[여계봉의 인문기행] 겨울 산이 주는 가르침

여계봉 선임기자

 

휴일 아침, 밤새 눈이 내렸다는 소식에 급하게 친구들과 연락하여 소위 번개산행을 하러 집을 나선다. 도봉산 자락에 들어서자 휴일인데도 수목과 잡초, 산짐승과 미물조차 삼매의 경지에 든 듯 조용하다.

 

아득한 도봉산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길을 한 발 한 발 무심하게 내딛는다. 아침까지 내린 눈으로 계곡 안쪽 응달에는 껑충 큰 이깔나무들이 눈꽃을 피운 채 서있다. 바람이 지나가자 나무에 달린 눈꽃들이 우수수 흩날린다.

 

 

겨울 산을 오르며 인간이 걷는 산길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숱한 사람들이 상처를 남긴 산길에 밤새 포근한 눈이 내려 생채기를 덮어주었건만 사람들은 다시 굵은 발자국을 남긴다. 보다 못한 길가 참나무가 줄기에 걸린 눈송이를 털어서 산길에 댕겨 쌓는다.

 

나이가 들어 계절의 흐름에 애잔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 시절에는 일상의 작은 변화에도 가슴 설레였으니 계절이 바뀌는 것은 거의 경이로움이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계절의 변화에 대한 느낌은 점점 무디어지고 그저 세월의 흐름이 자꾸 애잔하게만 느껴져서 아쉬움이 더하는 것 같다. 시간은 젊은이나 장년이나 노인 모두에게 평등하게 흘러가지만, 그 흐름에서 전해 받는 감성과 느낌은 서로 다른 것 같다.

 

 

설핏 눈이 덮인 도봉계곡의 너설은 용의 비늘인 양하다. 바위 사이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처럼 나의 맥박도 생기를 더한다. 여울지는 곳의 얼지 않은 물은 맨 얼굴을 내밀고 눈송이를 삼킨다. 
우이암으로 향하는 능선을 따라 계곡도 허리를 세운다. 문득 구름이 산봉우리를 만들어 낸다. 흐린 겨울날 산을 오르는 매력이다. 이제 눈도 그쳤다.

 

능선길에 올라서니 희디 흰 눈꽃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린다. 우이암 전망대에 서니 구름이 물러가 사방이 훤하다. 서로는 북한산 인수봉, 백운대와 상장능선, 북으로 오봉과 여성봉, 동으로 주봉,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 포대능선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남으로는 수락산과 불암산의 설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장대하게 이어진 산줄기는 마을을 평화롭게 품고 누웠다.

 

 

하얀 설경 위에 펼쳐진 산길을 따라 계단을 올라서니 바위 사이로 우이암의 뾰족 봉우리가 실루엣을 드러내는데, 바위 앞에 선 참나무 우듬지가 솜털 같다. 마음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는 겨울 산의 손길이다. 언제 보아도 흐뭇한 겨울 산의 너그러움이다.

 

하산 길에 만나는 보문능선의 빈숲은 숫눈의 기운으로 활짝 밝다. 기분 좋을 정도로 미끄러지는 걸음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능선 왼쪽으로 도봉산 자운봉과 협시한 봉우리들이 끝까지 우리를 따라온다. 세파의 찌든 때, 속세의 모든 근심과 고민을 눈밭에 묻고 이윽고 겨울 산을 내려선다.

 

눈에 덮힌 겨울 산은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의 가르침을 주는 곳이다.

겨울 산은 사람보다 낫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3.12.26 14:12 수정 2023.12.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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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