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갑진년 새해, 등태백산(登太白山)

여계봉 선임기자

2024년 갑진년 새해에 재경 마산고 동문들과 함께 태백산국립공원 유일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겨울 태백의 품속으로 들어선다. 태백산은 산세가 암소 잔등처럼 완만하기 때문에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유일사, 사길령, 백단사, 당골 어디에서 시작하든지 5∼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보통 유일사 쪽에서 올라가 당골 쪽으로 내려가는데 유일사 코스는 8분 능선 부근이 평평한 언덕, 즉 평전(平田)이다. 여기는 봄엔 철쭉꽃이 장관이고 겨울엔 눈꽃이 황홀하다. 초중반이 약간 가파를 뿐 8분 능선까지 오르는 데 깔딱 고개 같은 것도 없다. 더구나 출발지점인 유일사 주차장이 이미 해발 890m로, 꼭대기 장군봉(1,567m)까지 이미 반쯤은 오른 것이다.

 

무채색의 숲으로 들어선 산꾼들 행렬

 

유일사를 향해 한 발 한 발 무심하게 걷는다. 헉헉! 하얀 입김이 뭉툭뭉툭 똬리를 튼 채 가뭇없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껑충 큰 이깔나무들이 하얀 눈꽃을 다발로 피운 채 서 있다. 눈 이불 뒤집어쓴 졸참나무, 물박달나무, 고로쇠나무, 생강나무, 층층나무, 가래나무, 물푸레나무... 매운바람에 나무들이 진저리를 친다. 산꾼들 발자국 소리에 눈꽃들이 우수수 흩날린다. 호르르 호잇! 갑자기 새소리까지 들려온다.

 

휴일이라 눈꽃산행을 하러 전국에서 온 탐방객들로 등산로가 가득 차 발걸음을 내딛기도 힘들 지경이다. 해발 1,200m 남짓 되는 유일사까지는 급경사 등산로는 아니지만 꾸준한 오르막이라 다소 힘은 든다. 유일사는 태백산 자락에 있는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다. 이곳에서 사길령 가는 길은 대간 길이다. 사길령은 경상도 봉화와 춘양에서 태백으로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유일사에서 능선 위로 올라서서 산죽이 부드러운 눈 이불을 덮고 있는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주목 군락지에 들어선다. 이 산길의 임자는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주목이다.

 

수백 년 동안 대간 길을 지켜온 태백산의 주목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朱木)과 한겨울 눈꽃이 어우러져 황홀함을 빚어내는 태백산은 능선과 골짜기마다 눈꽃이 만발해 그야말로 '겨울 산행의 1번지'라 할 만하다. 태백산에서 자라는 주목은 3,000주 가량 된다고 한다. 수령은 대부분 500년 이상으로, 우리나라 주목 군락지 중 가장 대단위를 형성하고 있다. 태백산의 주목 설경은 설경 중에 최고로 꼽힌다. 능선에 눈보라가 몰아칠 때마다 햇살이 그리워 실눈을 뜬 채로 고개 숙이고 버티어온 주목들이 애처롭기도, 한편으로 존경스럽기도 하다.

 

주목 군락지를 지나면 사계가 트이면서 백두대간의 골격이 드러난다. 태백산은 편안하다. 한강(검룡소)과 낙동강(황지연못)의 발원지가 인근에 있고, 크고 작은 온갖 산들의 어머니인 살집 두툼한 육산(肉山)이다. 굵은 뼈는 살집에 숨어있다.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후덕하다. 높되 험하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그 품이 아늑하다. 역시 ‘큰 밝음의 산’이다.

 

장군봉에서 천제단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가득 메운 산꾼들

 

이윽고 태백산 정상에 오른다. 잔설만 남았지만 하늘은 청자처럼 푸르고 탱탱하다. 대간 능선에 올라서니 함백산, 금대봉, 은대봉, 두타산, 매봉산, 구룡산, 면산, 백병산, 응봉산 등 굵직한 봉우리들이 태백산을 빙 에둘러 서 있고, 바로 앞 함백산과 매봉산의 풍력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한반도 등줄기 역할을 하는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이 백두산이라면, 대간의 13 정맥을 비롯한 많은 기맥과 지맥들, 그리고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강줄기들을 품어 생명의 터전이 되어준 곳이 바로 태백산이다. 

 

태백산 정상 장군봉(1,567m)

 

태백산의 백두대간은 북으로는 함백산, 남으로는 소백산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은 발로 걷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걷는 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제각기 신심으로 걷는 마음 길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걷는 자만이 백두대간의 속살을 보면서 대간과 사랑을 속삭이게 되고 결국 백두대간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장군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마루금의 설경

 

태백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신라 때 ‘왕이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그 좋은 예다. 정상부근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천제단이 3곳이나 있다. 가운데 천왕단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 장군단, 그 아래 하단이 그렇다. 그중 천왕단이 가장 규모가 크다.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앞뒤 폭 8.26m인데, 보통 천왕단을 일컬어 태백산 천제단으로 뭉뚱그려 부르기도 한다. 천왕단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붉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준비한 제물을 제단에 올리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며 일행들과 함께 큰절을 올린다. 위패로 모셔진 한배검은 대종교의 국조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천제단. 제단 안에 '한배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왜 태백산 정상부근엔 천제단이 3곳이나 이어져 있을까. 가운데 영봉에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왕단, 북쪽에는 사람에 제를 올리는 장군단, 남쪽에는 땅에 제를 올리는 하단이 있다. 따라서 태백산은 하늘과 땅, 사람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조화로운 삶이란 바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인 삼재(三才) 사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제단에서 당골로 내려서는 길. 정면에 문수봉이 보인다.

 

그동안 같이했던 백두대간과 작별하고 천제단에서 망경사를 거쳐 당골 방향으로 하산한다. 망경사 바로 위에 태백산 산신 단종대왕을 모신 단종비각이 있다. 비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碑)'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 산신, 조카인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쿠데타를 모의하다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 산신이 되었다.

 

단종비각 바로 아래 해발 1,470m에는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망경사가 있다. 시야가 탁 트이고 햇살 투명한 양명한 곳이니 어찌 암자가 깃들이지 않을까. 절 입구에 있는 '용정(龍井)'은 고지대에서 솟아나는 샘으로, 국내 100대 명수 중 가장 차고 물맛이 좋다. 

 

옛날부터 천제에 올리는 제수(祭水)로 사용되고 있는 망경사 용정

 

반재로 내려서는 산길은 신작로처럼 넓은 길이다. 몸이 길을 가지만 정작 앞서가는 건 마음이다. 마음을 움직여 무소의 뿔처럼 산길을 걷다 보면 야릇하도록 쓸쓸한 정취 속에서 몸이 고단하니 오히려 영혼은 맑아진다. 겨울 산은 수목과 잡초, 산짐승과 미물조차 삼매의 경지에 든 듯 조용하다. 봉우리는 아득하고 눈길을 한 발 한 발 무심하게 걷는다. 계곡 왼쪽 응달에는 껑충 큰 이깔나무들이 눈꽃을 피운 채 서 있다. 바람이 지나가자 나무에 달린 눈꽃들이 우수수 흩날린다.

 

반재에서 당골로 내려가는 계곡 길은 깊은 삼매에 빠져 있다.

 

산 날머리 석탄박물관 앞에 있는 안축의 '登太白山(등태백산)' 시비에서 발길을 잠시 멈춘다. 태백산에 들러 산세의 아름다움과 단종의 애통함을 노래한 시인 묵객은 많다. 오늘 태백산 심설산행의 감흥을 잊지 않기 위해 고려 말기에 문명(文名)을 드날렸던 안축의 칠언율시 한편을 암송해 본다.

 

 

登太白山(등태백산)

 

直過長空入紫烟(직과장공입자연) 

긴 허공 곧게 지나 붉은 안개 속 들어가니

 

始知登了最高顚(시지등료최고전) 

최고봉에 올랐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네

 

一丸白日低頭上(일환백일저두상) 

둥그렇고 밝은 해가 머리 위에 나직하고

 

四面群山落眼前(사면군산락안전) 

사면의 뭇 산들이 눈앞에 내려앉았네

 

身逐飛雲疑駕鶴(신축비운의가학) 

몸은 날아가는 구름 쫒아 학을 탄 듯하고

 

路懸危磴似梯天(로현위등사제천) 

높은 층계 달린 길 하늘의 사다리인 듯

 

雨餘萬壑奔流漲(우여만학분류창) 

비 온 끝에 온 골짜기 세찬 물 불어나니

 

愁度縈廻五十川(수도영회오십천) 

굽이 도는 오십천을 건널까 근심되네

 

謹齋 安軸(근재 안축)

 

2024년 갑진년 새해에는 테백의 품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과 자연의 가르침에 맞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면서 귀경하는 버스에 오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4.01.15 11:05 수정 2024.01.1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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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