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웅포해전의 경과와 승리 요인

이봉수

임진왜란 개전 이래 가장 치열했던 부산대첩을 치르고 여수로 돌아와 군사를 재정비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다시 조정으로부터 도망갈 조짐이 보이는 적을 바다에서 막고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고 웅포로 향했다. 이런 상황은 이순신 장군의 1593년 2월 17일 장계 '영수륙제장직도웅천장(令水陸諸將直擣熊川狀)'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선 장계 내용부터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은 1593년 2월 17일 오후 4시경 거제땅 칠천량(거제시 하청면 옥계리 일대)에서 우부승지 정희번이 1월 29일 자로 발송한 서장을 선전관 이춘영으로부터 받았다. 서장의 내용은 "이번에 명나라 군사들이 평양성을 수복하고 적을 휘몰아 쫓으니 서울의 적들도 도망쳐 돌아갈 것이니 그대는 수군들을 모두 거느리고 합세하여 적을 쳐서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이미 선전관 채진과 안세걸이 먼저 갖고 온 서장에 의거 1월 30일에 소속 수군을 전라좌수영에 모두 집결시키고 출동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러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배를 띄우지 못하고 며칠을 기다린 후 2월 6일 출발하여 7일에 거제땅 견내량에서 원균과 만나고 8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뒤따라와 합세했다.

 

더 자세한 기록은 난중일기에 나온다. 1593년 2월 6일 동이 틀 무렵 여수를 출발한 이순신함대는 저물녘에 사량(통영시 사량면 진촌리)에 도착하여 밤을 지냈다. 7일 새벽에 사량을 출발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소비포권관 이영남, 사량 만호 이여념 등을 만났다.

 

8일 아침에 원균이 이순신의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았다고 심하게 화를 내며, 경상 우수군만 먼저 출발하겠다고 했다. 이순신은 곧 올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정오경에 이억기가 40척가량의 전선을 이끌고 나타나자 증원군을 만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연합함대는 이동하여 오후 8시경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9일에는 폭풍우가 몰아쳐 칠천량에 머문 후, 10일 아침 6시경 출발하여 적이 농성하고 있는 웅포로 향했다.
 

[제1차 웅포해전]​
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줄지어 정박해 있는데, 밖으로 끌어내어 섬멸하려고 두 차례나 유인 작전을 펼쳤으나 겁을 먹은 적은 나오지 않았다. 밤 10시경 연합함대는 안전지대인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뒤쪽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물러나 밤을 새웠다.

 

[제2차 웅포해전]​
11일에는 소진포에서 군사를 쉬게 하고 머물고 있다가, 12일 새벽에 출발하여 다시 웅포로 가서 유인책을 썼지만 적은 여전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칠천량(거제시 하청면 옥계리)으로 물러났는데, 밤새 폭우가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불순한 일기 때문에 17일 세종의 제삿날까지 칠천량에 머물고 있었다. 송진포와 칠천량은 폭풍우를 피해 대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저물녘에 선전관이 갖고 온 유지를 받아보니, 적이 돌아가는 길목으로 나아가 후퇴하는 적을 무찌르라는 내용이었다.

 

[제3차 웅포해전]​
18일 새벽 다시 이른 아침에 군사를 움직여 웅포로 갔다. 사도첨사 김완을 복병장으로 하여 송도(창원시 진해구 연도동 솔섬, 매립으로 섬이 없어졌음)에 매복해 있도록 하고, 여러 배들이 유인책을 쓰니 적선 10여 척이 뒤쫓아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5 척이 경솔하게 먼저 돌진하니 다른 복병선들도 나아가 적을 둘러싸고 잔뜩 쏘아대니 많은 적들이 죽고 머리 1급을 베었다. 이날 날이 저물어 원포(창원시 진해구 원포동)로 가서 물을 긷고 사화랑(창원시 진해구 명동 삼포마을)에서 밤을 지냈다.

 

[제4차 웅포해전]​
19일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사화랑에서 머물고 있다가 20일 새벽 다시 웅포로 출동했으나 교전이 시작되자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우리 배들끼리 서로 부딪혀 파손되고 제어하기 힘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즉시 초요기를 세우고 전투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흥양 1척, 방답 1척, 순천 1척, 여수 본영 1척의 배가 부딪혀 파손되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거제도 소진포로 철수하여 물을 긷고 밤을 보냈다. 21일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밤까지 비가 내려 그대로 소진포에서 머물렀다.

 

[제5차 웅포해전]
22일 새벽에 구름이 끼고 샛바람이 불었지만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적을 토벌하는 것이 급해서 일단 소진포에서 사화랑까지 진출하여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잦아들자 급히 움직여 웅천에 이르렀다. 의능, 삼혜 두 승병장과 의병장 성응지를 웅포왜성 좌측에 있는 제포(창원시 진해구 남문동)로 보내어 상륙하는 척하고, 전라우수사 휘하의 전선 중에서 전투력이 떨어지는 부실한 배들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 역시 상륙하는 척하는 기만전을 펼쳤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왜적이 갈팡질팡하면서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주력부대가 정면을 치고 들어가 적을 거의 다 섬멸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포 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도 안 내렸는데 돌진해 들어가다가 얕은 곳에 좌초되어 적이 배 위로 올라왔다. 이와 관련한 일본 측 기록인 협판기(脇坂記) 1593년 2월 21일 기록을 보면,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의 두 부대가 조선수군의 배를 1척씩 탈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날 진도의 지휘선인 상선(上船)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태롭게 되자 우후 이몽구가 들어가 구출해 나왔다. 이를 보고도 경상우도 수군들은 못 본 척했다고 이순신이 원균에게 따지며 탄식했다. 상당히 격렬했던 전투를 마치고 연합함대는 다시 소진포로 돌아와 숙박했다.

 

23일까지 소진포에 머물고 있던 연합함대는 24일 아침 웅포를 향하여 다시 발진하였으나 영등포(거제도 북단의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에 이르자 폭우가 내려 배를 댈 수 없어 가장 안전한 곳인 칠천량으로 들어가서 대피했다. 이후 기후가 순탄치 못하여 칠천량에서 27일까지 머물렀다.

 

웅포해전지

 

[제6차 웅포해전]
28일 새벽에 날이 쾌청하여 새벽에 칠천량에서 출발하여 웅포왜성 앞 가덕에 이르니 적은 움츠려 있으면서 나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전라좌수군의 배가 김해강 아래 독사리목(부산시 강서구 명지동 성산마을)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올리고 급히 나아가 작은 섬을 둘러쌌다. 그 섬을 들락거리는 작은 배 두 척을 잡고 보니 원균의 군관과 가덕진첨사 전응린이 보낸 사후선 2척이 왜군에게 희생된 어민들의 머리를 찾아내고 있었다. 이들을 잡아 원균에게 보냈더니 수급을 확보하는 전공에만 눈이 먼 원균이 크게 화를 냈다. 저녁에 사화랑으로 돌아와 숙박하고, 다시 날씨가 사나워질 것 같아 이튿날인 29일에는 다시 칠천량으로 배를 옮겼다.

 

이후 3월로 접어들자 칠천량에 머물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게 명나라 원군이 벽제관전투에서 패하고 평양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순천부사 권준은 큰 병에 걸려 순천으로 후송되어 돌아갔다. 이 무렵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7차 웅포해전]
3월 6일 새벽에 칠천량에서 출발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무리가 급히 도망쳐 산 중턱에 진을 쳤다. 아군이 철환과 편전을 빗발치듯 쏘아대니 죽은 적의 수가 아주 많았다. 전투 중 포로가 되어 잡혀 있던 사천 출신 여인 1명을 구출하여 칠천량으로 돌아와 밤을 보냈다. 제7차 웅포해전에는 신무기인 비격진천뢰가 사용되었다고 임진장초 토적장(討賊狀.1953년 4월 6일)에 기록되어 있다.

 

동여도에 나타난 웅포 왜성

이순신 장군은 7차에 걸친 전투에서 웅포왜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조정에서 지시한 대로 도망가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적은 일본으로 도망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이순신함대는 여수로 귀환 길에 올랐다. 3월 7일 저녁에칠전량을 출발하여 8일 새벽에 걸망포(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신봉마을)를 거쳐 한산도에 도착했다.

 

이날은 이순신 장군의 생일이었다. 종일 비가 내리는 한산도에서 술과 음식을 갖고 온 휘하 장수들과 함께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무렵부터 이순신 장군은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기기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천문과 지리의 대가인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을 봉쇄하여 곡창인 전라도 쪽으로 서진하는 적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수군기지로 한산도를 낙점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한산도에서 이틀을 머문 이순신 장군은 3월 10일 아침 식사를 한 후 출발하여 사량을 거쳐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복귀했다. 웅포의 적을 치기 위하여 1593년 2월 6일 여수를 출발한 지 꼬박 35일 만에 본영으로 돌아왔다.

 

웅포해전은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겼다. 두 달에 걸쳐 바다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날씨가 아주 불순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은 낮에는 웅포를 공격하고 밤이 되면 풍랑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거제도 소진포나 칠천량으로 물러나 안전한 곳에서 병사들을 쉬게 했다. 천문과 지리의 대가답게 지형을 활용하여 적절한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도합 7회에 걸쳐 전투를 벌였는데 5차 웅포해전이 가장 치열했다. 승리 요인은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을 쓴 것이다. 좌우에서 협공하는 척 기만전을 펼치면서 주력은 정면을 치고 들어간 것이 주효했다. 그러나 적을 얕잡아보고 서로 앞다투어 진격하다가 아군의 통선 2척이 좌초되어 적의 등선육박전에 걸려든 것은 큰 실책으로 평가된다. 이후 7차 웅포해전에서 신무기인 비격진천뢰까지 동원하여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웅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정은 말로만 명령을 내렸을 뿐 웅포왜성을 배후에서 공격할 육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ogokdo@naver.com

 

작성 2024.02.03 10:00 수정 2024.02.0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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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