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칼럼] 사람만이 희망이다

고석근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 구더기 밥이니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한때 여기저기서 “세상은 요지경,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하는 노래 가사가 흘러나왔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우리는 자조적인 가사를 마구 토해 내며 한 시대를 견뎌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은 가사대로 되어갔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는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일이 나무나 자주 일어나게 되면 결국에는 일상이 되고 상식이 된다.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아 상식이 되었건만, 여전히 가슴은 용인하지 못한다. 세상은 요지경이 되어버린다.

 

오래전에 교직에 있을 때, 나는 부적응자였다. 퇴근 후의 남교사들의 술자리가 너무나 버거웠다. 거의 매일 벌이는 술자리에 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빠지고 나면, 내 곁으로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재미없는 술자리는 고문이었다. 술에 취하면 요지경 세상이 되니 견딜 수 있었다.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하지만 술이 깨는 아침이 되면, 환멸이 몰려 왔다. ‘이게 사는 건가?’ 허수아비처럼 출근했다.

 

교직을 그만두고 시를 공부하며 신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술자리의 진수를 맛보았다. 술은 우리를 마법의 세계로 이끌어갔다. 요지경 속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이 깨어났다.

 

요지경 속은 환상이지만, 술이 이끌어가는 마법의 세계는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실제의 세상이었다. 우리는 술잔을 나누며 이 세상의 속살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시가 주는 마력이었다. 그 후 나는 이 세상의 환각에서 벗어났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사람은 어느 부분에서는 잘 나고 어느 부분에서는 못났다. 잘난 사람이 나였고, 못난 사람이 나였다. 모두 잘나고 모두 못난 사람들, 그렇게 사람은 평등한 존재였다. 서로 이끌어 주며 살아가는 세상,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였다.

 

비로소 그때 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 조르바의 마음이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 구더기 밥이니까.’

 

물론 그 후 이 마음이 온전히 보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만난 ‘사람’이라는 경이로운 존재는 내 가슴에 뜨겁게 남아 있다. 사람에게는 ‘처음도 끝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이 세상이 온통 잿빛이 된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이 뜨거워지면, 이 세상이 온통 꽃으로 피어난다. 한순간에 요지경 세상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게 된다.  

 

 

 안개 속을 걷는 것은 기묘하구나 

 모든 수풀과 돌이 외롭고, 

 나무들은 서로를 보지 못하며, 

 모두가 혼자이다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에서> 부분 

 

 

 시인은 안개 속을 걸으며 요지경 세상을 본다.

 ‘모두가 혼자’인 세상.

 모두 환상 속에 있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

 

작성 2024.02.29 11:22 수정 2024.02.2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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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