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칼럼] 시집의 용도

신기용

노년층 시인 몇몇이 어울려 “냄비 받침대 하나 얻었다.”라며 수다를 떤다. 창작 시집을 선물 받은 뒤, 냄비 받침대 용도로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시집의 용도는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용도는 읽기이다. 즉, 읽기용이다. 장식용, 소장용도 있다. 요즘은 냄비 받침대 용도로 사용한단다. 시인들도 선물로 받은 타인의 시집을 냄비 받침대로 사용한단다. 시집의 수준이 함량 미달이면 이렇게 천대한단다. 이런 천대받는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 이를 인지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한국에는 비정상적으로 시인이 많다. 대부분 시인은 출간한 시집을 지인들에게 선물로 배포한다. 사서 읽는 책이 아니라 얻어 읽는 책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작년(2023)에 한 시인에게서 헌 시집과 문예지를 몇 권 얻었다. 표지에 라면 조각이 붉게 눌어붙어 있었다. 국물 자국과 함께 짓눌러 납작했다. 다른 시집엔 자장면 조각이 검게 눌어붙어 있었다. 

 

자장 양념과 면 조각이 미라로 굳어 납작했다. 시집에서 라면이나 자장면 미라를 발굴할 수 있는 시대이다. 탄소 연대 측정이 필요 없다. 판권에 연도가 명확하게 찍어 있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시인의 집에 있던 시집이다. 범인은 뻔하다. 그 시인과 식구들의 짓이다. 그 시인의 집에 들어간 다른 시인의 시집이 이런 대우를 받는 시대이다. 자기도 시인이면서 다른 시인의 시집을 읽지 않고 외면하다 못해 학대하고 천대한다. 

 

시인의 집에 있던 시집 표지가 이 정도면, 일반인의 집에 있는 시집은 더할 것이다. 냄비 받침대 전용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온갖 뜨거운 음식의 받침대로 사용한 흔적, 여러 개의 전화번호가 불규칙적으로 삐뚤빼뚤 적힌 상처투성이 시집을 간혹 접한다.

 

시집 속의 활자들은 뜨거워 발버둥 친다. 뛰쳐나가고 싶어도 박제된 신세라서 견뎌 내야만 한다. 활자를 안락하게 감싸고 품어 안은 여린 표지는 핏자국(김칫국물), 멍 자국(자장 양념)투성이이다. 심지어 살갗에 화상 자국이 많다. 시집의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때 욕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 시집을 읽기용으로만 사용하면 더 좋겠다. 시인이여, 시집을 읽으면서 라면도 먹고 자장면도 먹자. 시집의 여린 살갗에 뜨거운 냄비를 놓지 말자!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7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

이메일 shin1004a@hanmail.net

 

작성 2024.04.02 10:26 수정 2024.04.0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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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