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구름잡이라 할 때는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가 ‘구름’이라 할 때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기보다는 ‘데이터 구름’이거나 ‘네트워크 구름’을 말할 정도로 자연계와 기계문명의 기술계가 구분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지난 2015년에 출간된 저서 ‘경이로운 구름: 기초적인 미디아 철학에 대한 소고’에서 예일대 교수로 미디어와 사회이론학자인 존 디 피터스는 클라우드가 우리의 새로운 환경으로 가까운 미래에 잡다한 모든 것들이 모두 구름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의 몸이 단말기가 되어 구름과 우리 몸 사이에 문서와 영상이 흐르는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예측한다.
우리는 매체가 환경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역(逆)도 또한 진(眞)이라는 주장이다. 또 2015년에 나온 ‘모든 것의 진화: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성되는가’와 ‘붉은 여왕: 성과 인간성의 진화’ 그리고 ‘유전체 게놈’ ‘합리주의적인 낙관주의자: 어떻게 번영이 이루어지는가’ 등 베스트셀러 과학명저의 저자이면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국회의원이기도 한 매트 리들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과학이란 사실을 수집해 나열해 논 카탈로그가 아니고, 새롭고 더 큰 미스터리를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인 ‘비물질주의’ 이론을 주창한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세상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라고 했다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와 같은 뜻이었으리라. 우리 선인들은 인생이 하늘의 한 조각 뜬구름 같다고 했다. 구름이 있으면 천둥번개도 있게 마련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벨라루시아의 저널리스트로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이다. 소설가도, 시인도 아닌 그녀는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를 창시했는데, ‘목소리 소설’이라고도 하지만 작가 자신은 ‘소설-코러스’라고 부른다.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알렉시예비치는 현재 새 책 ‘영원한 사냥의 아름다운 사슴’을 탈고, 그 마무리 작업 중이라는데, 다양한 세대 간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죽이고 죽는지에 대한 책을 써온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인간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제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쓰고 있어요. 사랑은 우리를 세상다운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요. 사람을 사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요.”
정녕 세상살이가 구름잡이처럼 그 실체가 없다 해도, 또 실체라는 것이 고체나 액체나 기체로 그 형상과 형태가 변하지만, 그 원소 H2O만큼은 변하지 않고 항상 같듯이 우주의 본질은 언제나 사랑이어라. 고드름 고추가 되든, 이슬방울이 되든, 숨찬 뜨거운 입김 아니 숨기운이 되든, 천둥번개를 몰고 오는 사랑의 구름이어라.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이며 정치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도 이렇게 말했다지 않나.
“(운명의 여신) 그녀는 계산적인 남자보단 무모한 남성을 선호한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매한가지로 자기를 마음에 두지 않는 짝사랑인 것 같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효도란 자연의 섭리와 천리를 거슬러 치사랑을 강요하는 게 아닌가. 그 한 예가 ‘심청전’이고 그 반대는 ‘고려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부모와 남자의 사랑이 주는 것이라면 부모와 남자의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서의 자식과 여자는 그 사랑을 부모와 남자에게 ‘받아주는’ 것이리라. 그 사랑을 받아서 되돌려주는 것이 ‘되사랑’이라면 자식이나 여자로서는 부모와 남자의 사랑을 감사히 기쁘게 받아주는 것으로 셈이 끝난다. 주고 싶은 사람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고 ‘받는’ 것이 ‘주는’ 일이고 주는 사람에게 주는 더 큰 선물이 되리라.
1950년대 청소년 시절에 내가 즐겨 들은 미국 가수 해럴드 척 윌리스(1926-1958)의 노래가 있다. ‘내가 뭣 때문에 사는데, 널 위해서가 아니라면’이 반복되는 가사가 평생토록 내 머릿속에 아니 내 가슴 속에 늘 메아리치고 있다. ‘널 위해서’ 숨 쉰다고 할 때, 이 ‘너’는 내가 짝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자식일 수도, 손자 손녀일 수도 있으리라. 다만 ‘널 위한다’는 구실로 상대방에게 부담감이나 고통을 준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고 제 욕심에 불과한 사랑의 정반대이리라. 이런 욕심과는 달리 순수한 열정이 있을 때 진정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우주만물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그 좋은 예가 미국의 유명 가수 ‘레이디 가가’는 얼마 전 예술과 예술교육을 장려하는 비영리 단체가 주는 상을 받는 수상 연설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내가 커서 뭐가 될는지는 몰랐지만 난 언제나 조금도 겁먹지 않고 용감하게 우주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 그 소리가 어떤지,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내 삶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이 말은 ‘호기심’과 ‘열정’이 ‘사랑’과 동의어가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녀처럼 우리도 모두 자신과 자신의 삶을 자신의 최고 걸작품으로 한가락 한가락씩 완성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내리사랑, 치사랑, 짝사랑, 되사랑, 가릴 것 없이 이 무궁무진하게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열정으로 무지개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배를 타고 코스모스 바다로 노를 저어 보리라.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고 생자필멸이라 하고, 아무리 성한 사람도 반드시 쇠할 때가 있다고 성자필쇠라 하며, 우리가 보통 ‘태어난다’고 하는 그 생도, 그 실은 무생이라는 뜻으로 생즉무생이라고 한다.
‘투리토프시스 누트리쿨라’라고 불리는 불로장생의 생명체가 해양생물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어모아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모든 생물이 생로병사를 면치 못하지만 이 해파릿과의 생명체만큼은 늙으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계속해서 생명을 연장해 간단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이승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믿기지 않는 신화도 동화도 아닌 ‘생물화’의 기적 같은, 아니 기적 이상의 자연현상을 과학자들은 이형분화의 원리로 설명하는데, 이 현상은 하나의 세포가 또 다른 세포로의 변형을 말한다. 그 한 예로 도마뱀이 꼬리를 잘린 다음에도 그 자리에 다시 꼬리가 생기는 경우다. 그러니 태아 상태에서 성장했다가 다시 태아로 돌아가는 생명의 영생불멸이 아닌가. 이 신비로운 생명체는 전 세계 바다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요즘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어 사람이 장수하는 것이 복인지 화인지 모를 지경인데, 인간도 이 해파리처럼 죽지 않고, 늙으면 다시 젊어지고, 영원무궁토록 생명이 반복해서 연장된다고 상상해 보자.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이 이어진다고 상상해 보면, 그렇다면 청춘의 아름다움도, 삶의 소중함도, 인생의 희노애락도 모르지 않겠는가. 양념이나 간이 전혀 안 된 음식을 한도 끝도 없이 먹는다고 상상해 보자. 떨어져 봐야 임이고, 떠나와 봐야 고향이다. 아무리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하루 24시간 온몸이 꼭 붙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좋은 섹스도 쉬지 않고 계속해야만 한다면, 더 이상 쾌락이 아니고 고역 같은 중노동이 되고 말리라. 어둠이 없는 빛을 상상인들 할 수 있으랴. 삶도 사랑도 마찬가지 아니랴. 그렇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순간만 영원하리.
“신기하게 안 떨리더라. 무대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았다. 연주는 손이 저절로 하고 있었고, 나는 내가 연주하는 음악을 즐기면서 듣고 있었다.”
몇 년 전 제17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말이다. 이게 어디 조성진 군만의 얘기일까.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가 뭘 하든 다 경험하는 일 아닌가. 어린애들이 뭘 갖고 놀든 놀이에 몰입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우주만물이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날개는 날개대로, 움직이고, 눈과 귀는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보고 들으며, 가슴과 머리는 뛰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을, 물론 한 번에 하나씩,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노라면 나와 만물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고, 문자 그대로 혼연일체로 혼연천성이 되리라.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든, 악기를 연주하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든, 사랑을 하고 무슨 짓을 하든, 하는 일에 몰입하다 보면, 소리와 내가, 동작과 몸이, 악기와 몸이, 글과 생각이, 그림과 느낌이, 너와 내가, 꿈과 현실이 같은 하나가 되지 않든가. 이런 경지를 불교에선 무아의 열반지경이라 하고, 성적으로는 오르가즘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요즘 미국에선 백인 중년층의 사망률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자살과 마약 남용이 그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015년 11월 3일 자 ‘공화당 대선후보들을 후보 자신들로부터 구하기’란 제목의 사설에서 2012년 공화당 후보 밋트 롬니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에게 패한 후 그 패인을 연구 조사한 보고서의 “어떤 정치적 토론도 도전적이고 생동감 있게 공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을 인용했다. 이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말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지상지침(至上指針)이 아니랴. 특히 오늘날처럼 사회적인 거리 두기로 사람마다 ‘외톨이’ 신세가 된 처지에선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미국의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부(富) 같이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실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네가 네 삶을 간소화할수록 우주법칙도 간소화될 것이고, 고독이 고독이 아니고, 빈곤이 빈곤이 아니며, 약함이 약함이 아니다”
이는 물신주의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에게 일찍이 우리 선인들이 권장한 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함을 안다는 뜻의 안분지족하고, 구차한 중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긴다는 의미의 안빈낙도하라는 것이리라. 미국의 가장 위대한 법철학자로 꼽히는 올리버 웬델 홈스(1841-1935)도 갈파했듯이 말이다.
“삶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유일한 물음은 네가 그 삶을 얼마나 충만하게 사는가?” 그러자면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 느낌과 생각을, 우리 삶을 간소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짐, 온갖 잡동사니를 가차 없이 단호하게 하나둘 다 버려야 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인터넷에 오만소리 잡음과 오만 가지 가짜 뉴스와 정보홍수가 범람하는 마당에 눈 깜찍할 만큼 짧은 우리 인생의 소중한 순간순간을 우리가 어찌 한 찰나인들 낭비하고 허비할 수 있단 말인가.
2017년 출간된 스웨덴인 저자 마가레타 맥누슨(1934 - )의 책 ‘죽기 전에 평생토록 쌓여온 짐 미리 깨끗이 다 정리하기’가 있다. 이 책 제목 그대로, 우리 모두 물질적인 짐뿐만 아니라 마음과 머릿속에 적폐되어 온 온갖 쓰레기 같은 감정과 사상을 어서 말끔히 치워버리고 그동안 극심히 오염된 지구생태계 환경을 정화하고 파괴된 자연의 질서를 바로잡아 회복시킬 수 있는, 절체절명의 경고성의 엄중한 최후통첩으로, 절호의 마지막 찬스를 현재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주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어라.
여행은 가볍게 해야 한다. 짐을 무겁게 많이 갖지 말고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해야 여행을 즐기면서 잘할 수 있다. 우리 인생 여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벌레처럼 기어서 또는 동물처럼 뜀박질로 갈 수도 있겠지만, 더 좀 많이 보려면 새처럼 하늘 높이 날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사랑의 무지개 타고 잠시 지구별에 소풍와 머무는 우주나그네 코스미안으로서 말이어라. 그러려면 우리 몸을 불사르는 혼불을 지펴야 하리라. 확대경으로 햇빛을 한데 모아야 불꽃을 피울 수 있듯이 우리 삶의 모든 열정과 사랑과 꿈을 한 점으로 집약, 압축, 축소시킬 때에라야 가능하리라. 그제야 모든 ‘쓰레기’를 다 불태워 버리고, 훠어이, 훠어이, 코스모스하늘로 날 수 있으리라.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이 시조 한 수를 읊은 이는 조선의 문신 서예가 봉래 양사언이라고도 하고 퇴계 이황(1501-1570)과 함께 조선 중기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율곡 이이(1536-1584)라고도 한다. 중국 산동성의 태산은 그리 높지가 않고, 우리나라의 한라산, 설악산, 백두산은 그보다 높단다. 태산이 있으려면 깊은 골짜기 심곡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조를 이렇게 변조해 읊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심곡이 깊다 하되 땅 위에 골짜기로다.
내리고 또 내리면 못 내릴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내리고 계곡만 깊다 하더라.
영어에 이런 말이 있다. “최선을 희망하되 최악에 대비하라”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란 뜻이다. 우리말로는 ‘밑져야 본전’이라고 처음부터 최악을 각오하고 시작하면 크게 실망할 일 없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안절부절못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리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직접 거듭 경험한 바로는 무슨 일이든 방심이나 안심하고 했다가는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되던가 낭패를 보게 되고, 많이 걱정했다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잘 풀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연애고 사업이고 아무 일을 하더라도 나는 언제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버릇을 길러왔다.
태산을 오르더라도 낭떠러지로 깊은 산골짜기 밑바닥까지 떨어질 각오가 되어있으면 겁날 것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죽을 각오라면 뭔들 못하랴. 설혹 내세가 있고 지옥이 있다 하더라도 지옥의 맨 밑바닥까지 떨어질 각오만 돼 있다면 뭣이 두려우랴. 그런데 인생 80여 년 살아오면서 겪어보니, 어려움도 아픔도 슬픔도 언제나 생각보단 훨씬 덜하고, 기대치를 밑바닥인 제로로 낮추고 시작하면 실망할 일도 절망할 일도 없이 결과가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워 감사할 일뿐이다.
그래서 세상의 단맛 보기 전에 쓴맛부터 봐야 한다고,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뜻으로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는 것이리라. 이 고진감래라는 말은 산을 오르는 힘은 골짜기에서 길러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1948 - )에게 수여하면서 스웨덴 아카데미는 이렇게 성명을 발표했다.
“그녀의 다성곡적 서술은 우리 시대 사람들의 수난과 용기에 대한 기념비다”라며 “비상하고 특별한 방식, 곧 다양한 인간의 목소리를 콜라주로 세심하게 합성함으로써 알렉시에비치는 우리가 포괄적으로 우리 시대를 깊이 이해하도록 해준다”라고 평하고 있다. 우리 그녀가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단순히 사건들과 사실들의 박제된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인간의 감성적인 느낌들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기재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사람들이 뭘 생각하고 그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며, 그 와중에 무엇을 기억하는지를, 그들이 뭘 믿거나 불신했는지, 어떤 환상과 희망과 공포를 경험했는지를. 어떻든 실제로 발생한 수많은 일들을 상상하거나 지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10년 아니면 20년 또는 50년 전에 우리가 어땠었는지 우린 쉽사리 잊어버린다. 난 관찰하고 뉘앙스와 구체적인 사안들을 찾아보려고 삶을 탐색한다. 내 인생의 관심사는 어떤 사건도, 전쟁도, 체르노빌 원전 사고도, 자살 등 잡다한 사태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이다”
인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알렉시체비치의 관심은 그녀의 글 문장마다 진하게 배어 있어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긍휼과 연민의 자비를 증언하는 작품들이라는 것이 평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와 같은 관심은 민족과 국가, 나아가 인류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개인사를 기억하는 데도 꼭 필요하리라. 개인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민족과 국가 그리고 인류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문제로 귀결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