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난해할 거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상의 오감도는 암호인지 비밀인지 혁신인지 파격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해석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근사한 해석을 내놓고 내 해석이 최고야 하면서 거드름 피운다. 후세 사람들에게 능력껏 해석해 보라고 난해한 문제를 턱 던져놓고 이상은 1937년 4월 17일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살기 싫었을까. 삶에게 진 것일까. 살아가기에 세상의 그릇이 너무 작았던 것일까. 환멸과 멸시와 우울과 병마에 포위당한 이상은 막다른 골목의 무서운 식민지에서 뛰어내리며 13인의 아해를 외쳤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건축가보다 시인이 좋았는지 ‘오감도’라는 시에 건축에나 있을법한 형이상학적인 기호와 숫자를 넣어 가장 어려운 시 ‘오감도’를 탄생시킨다. ‘조감도’는 들어봤어도 ‘오감도’는 못 들어본 단어다. 아마 추측하건대 건축용어인 ‘조감도’에서 새鳥 ‘조’를 빼고 까마귀烏 ‘오’를 넣어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새 鳥나 까마귀 烏나 둘 다 새는 맞지만, 까마귀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다르다. 까마귀는 예로부터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왔다. 태양에 산다는 전설 속의 ‘삼족오(三足烏)’도 까마귀다. 이상은 오감도를 통해 무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설에 의하면 烏는 잘못 기재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책을 펴내는 인쇄소 직원이 오감도를 최초로 인쇄할 때 鳥와 烏를 착각하여 오감도로 인쇄했는데 평소 이상의 독특한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인쇄소 직원은 이상이 찾아오자 겁나서 쫄았다. 그런데 이상은 오히려 인쇄소 직원을 와락 껴안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조감도에서 오감도가 되어 버린 건 정말 우연과 실수가 만들어 낸 최고의 제목이라고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럴듯한 이야기다. 오감도(烏瞰圖)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다. 하지만 너무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해 독자들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항의가 빗발쳤다. 원래 30편을 연재하기로 했으나 15편만 연재하고 조기 중단되었다.
이상은 1910년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몰락한 양반 가문인 백부 김연필에게 입양되어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한문 교육을 받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기사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백수가 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하던 잡지 ‘조선’에 김해경이라는 본명 대신 필명인 이상(李箱)으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9회 동안 연재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수필가와 건축가 그리고 화가로 종횡무진 활동했다. 특히 선구적인 모더니즘의 작가로서 시, 소설, 수필을 집필하며 모더니즘을 꽃피웠다. 이상의 문학은 자의식이 강하다. 세계적인 사조를 따라가며 우리 문학을 근대로 끌어올리다 보니 극단적인 관념론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독백 같은 이 문장은 단편소설 ‘날개’의 첫 구절이다. 이 구절만 봐도 이상은 외롭고 고독하고 어찌할 수 없는 식민지 백성의 내면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구인회 회원이 되어 박태원, 김유정 등과 친하게 지냈다. 특히 ‘봄봄’을 쓴 김유정과 형제처럼 지냈는데 이상은 도쿄로 떠나기 전 같은 폐결핵을 앓고 있던 김유정에게 동반자살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유정은 이를 거절하고 이상은 홀로 도쿄로 떠나버렸다. 도쿄에서 노숙자처럼 배회하다가 사상불온혐의로 체포되어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1937년 4월 17일 새벽에 27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면서 “센비키야의 메론이 먹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13인의 아해가 되어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되는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