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야 가슴에는 수심도~
필자가 주창하는 ‘아랑가(我浪歌)의 모태’는 ‘아리랑’이다. 이‘아리랑’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정통을 버무린 절창이다. 이에 대해서는 1890년대 일본 책자에도, ‘아리랑은 조선의 유행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아리랑’이 언제부터 불렸는지,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민족의 통가(統歌)로서 오랜 세월의 강을 흘러온 노래 임의 증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유로, 필자는 이 용어에서 ‘아랑’을 차운하고, 통속적인 노래를 지칭하는 ‘가요’에서 ‘가’를 차운하여, ‘아랑가’라고 명명하여, ‘트로트’라는 용어와 대체하자는 주창을 하고, 국민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특허권을 출원하여, 그 절차도 진행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1926년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의 OST <나운규의아리랑> 혹은 <신아리랑>을 스토리텔링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세상 인심은 무정도 한데요 / 내 마음은 유정도 해라 / 서낭당 까마귀 깍깍짖고 / 정든 님 병환은 날로 깊어 / 아리랑 고개는 눈물의 고개 / 울면서 넘고 넘는 슬픔의 고개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 / 잠을 자느냐, 꿈을 꾸느냐 / 날 생각하고서 번민을 하나 / 쓸쓸한 이 세상 외로운 이 몸 / 누구를 믿고서 한 백 년 살까
문경 새재 박달나무는 /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 담 넘어갈 때는 큰마음 먹고 /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며 / 날 버리고 가는 님은 / 가고 싶어 가나
산천의 초목은 젊어만 가고 /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간다 / 알뜰히 살뜰히 그리던 님을 / 언제나 만나서 안아 줄까 / 아리랑 고개는 웬 고갠데 / 한 번 가시면 오지를 않네
여보소 이 양반 내 팔 좀 놓소 / 인조견 저고리 등이 찢어져요 / 인조견 저고리 등 찢어지면 / 물항라 저고리 사다 준다나 / 쓰라린 가슴을 움켜나 쥐고 /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일락은 서산에 해가 지면 / 월출의 동령에 달이 솟네 / 굽 높은 구두를 오솔길에 신고 / 이리 삐뚤 저리 삐뚤 가관이로다 / 양옥집 아가씨 거동 좀 보소 / 엉덩짜기 넓어서 스커트가 터질라
딸가닥 게다 소린 신경질만 나고 / 펄러덕 하오린 먼지만 날린다 / 저 건너 묵밭은 지난해도 묵더니 / 올해도 날과 같이 또 한해 묵네 / 냉정한 이 세상 풍파도 많고 / 우리네 사랑엔 장애도 많다
무산자 누구냐 탄식을 말아라 / 부귀와 빈천은 돌고 돈다 / 네가 잘나서 일색이드냐 / 내 눈이 멀어서 환장이로다 / 사람이 중하냐 금전이 중하냐 / 두 가지를 놓고서 생각을 하여라(이하 생략~)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모티브와 배경지는 나운규의 고향 회령에서 청진까지 철도를 부설하던 노동자(일제 강제징용)들이 부르던 애달픈 노랫가락, 전래 아리랑에서 영감을 받아 착상했단다. 이 노래는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8천만 우리 민족의 통성(通聲)이고, 감성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노래다. <도라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막걸리 한 잔>에 엇댈 수 있는 민족의 절창이다.
아리랑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부터 지속해 오고 있으나, 분명한 근거로 정리한 자료는 없고, 먼 옛날부터 불려왔으되, 노래(농가 등)의 후렴구인 것이라는 결론만 합일된 상태이다.
문헌상 기원은 <만천유고>에 실린 <농부사>의 후렴구라는 통설이 있다. 이 책은 1801년 이승훈이 천주교를 전파하여 백성을 미혹시킨 죄로 처형당하고, 대략 50여 년 뒤인, 철종(1849∼1863) 무렵, 이승훈의 아들 이신규가 아버지의 유작 등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추정하며, 겉장에는 만천집(蔓川集), 안에는 만천유고(蔓川遺稿)로 제목이 붙여져 있다.
<나운규의아리랑>은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으로 단성사에서 개봉된 후, 2년 반 동안 조선 반도를 울렁거리게 했다. 가사는 구구절절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삶에 곡절을 운운했으니, 민초들 입에서 흥얼거림이 끊일 날이 있었으랴. 영화는 첫날부터 노랫말을 문제 삼아 조선총독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연유로 당연히 영화보다 주제가가 더 유명해진다. 민족의 통성으로 불리는 동시에, 식민지 터널을 씌운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을 배태하는 에너지원이 된다.
그 시절(1920년대)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 기조가, 헌병경찰제 무단통치에서 보통경찰제 문화통치 기조로 전환하던 시기다. 이즈음이던 1919년 10월 27일 김도산이 신극좌에서 영화 <의리적 구투>를 발표했다. 이것이 해방광복 후, 1947년 영화의 날을 10월 27일로 지정한 배경이다. 이 시기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16년째에 탄생한 <나운규의아리랑>은 우리 민족저항의 혁명적인 감성핵폭탄이었음이 분명하다.
1926년 10월 1일, 아리랑 개봉 극장 단성사 사장은 박승필이었다. 단성사는 1907년 서울시 종로구 묘동에 세워진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 영화관이다. 영화는, 아리랑 주제가와 함께 ‘개와 고양이’라는 글씨 자막이 나오고, 변사가 ‘… 평화를 노래하고 있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쌓이고 쌓인 슬픔의 시를 읊으려고 합니다. …… 서울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3·1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은 …’을 낭송한다.
영화 속에서 광인(狂人) 영진(나운규 분)은 낫을 휘두르며 오기호(송인규 분)를 쫓아간다. 기호는 이 마을의 악덕 지주 천가(千哥)의 머슴이며, 일본 경찰의 앞잡이다. 영화의 끝자락은 영진의 낫에 찔려, 기호는 죽고, 영진은 순경에게 붙잡혀 포승줄로 묶인다. 이때 영진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更生)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변사의 해설을 뒤로하며, 영진은 끌려가고, 주제가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당시 쓰였던 대본·시나리오·필름이 없음을 어이하랴. 통탄할 일이지만, 기록으로라도 접할 수 있음은 불행 중 다행이다. 민족보물창고에 국보급 보물을 망실한 것이지만, 어이하랴. 그래도 찾는 일에 손을 접어서는 안 된다.
당시 일본제국주의 경찰은 가사에 공공안전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선전물을 압수하고 출판물에서 5절 가사를 삭제하였단다. 조선예술가극단 출신 신일선(1907~1990)의 증언에 의하면, 개봉 당일 전단지 압수로 극장에서 변사가 부르지 못하였고, 조선가요선집의 것은 대본 제출 단계에서 아예 삭제당했단다.
나운규(羅雲奎)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여 1937년 34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생을 마감한다. 폐결핵이 원인이었다. 춘사(春史)라는 호를 사용하였으며, 만주 지방 길림성 용정 명동중학교를 중퇴했다. 정일권 전 국무총리와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이 다닌 학교다. 부인은 조정옥,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남양주영화종합촬영소에 춘사관이 있다.
전통가요나 대중가요가 갖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민족성과 전통성과 정통성과 통속성에 있다. 여기에는 해설이 필요치 않다. 가사와 가락이 실시간 감흥의 공명으로 울리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민족의 정한으로 공명된 <나운규의아리랑>의 사회화와 민족화는 8.15해방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계승되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국난의 고비 마다에서, 앞서서 구호를 외치던 치자(治者)들보다 민초들의 저력이, 그 고비를 극복하게 한, 에너지원이었음의 증거다.
잡지 <삼천리>(김동환 창간) 1932년 8월호에 따르면, <아리랑>을 처음 노래한 것은 김연실, 영화로 처음 제작한 것은 나운규, 연극으로 처음 만든 것은 박승희, 무용으로 처음 만든 것은 배구자라고 한다. 우리는 왜, 왜색(倭色)과 친일(親日) 반일(反日)로 대립각을 세우면서, 영색(英色)과 양색(兩色)에는 둔감한가.
1960년대부터 통용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풍성거리는, ‘트로트’라는 말은, 1910년대 미국에서 ‘FOX Trot’로 시작하여, 일본을 거치면서 ‘도로또, 도롯또, 도로도’등으로 천이되면서, 우리나라로 유입된, 양색과 왜색이 혼융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통용하는 ‘트로트’라는 용어(장르)에는 민족의 고유성과 정통성과 전통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께도 불손을 저지르는 일이다. 춘사 나윤규 선생에게도 송구한 처사다.
민족의 역사성과 고유성과 전통성을 훼손하는 통용이다. 글로벌 시대 한류(韓流)라는 단어와도 연계되지 않는다. 사전적으로도, 감흥과 감성적으로도 엇대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라도, ‘트로트’라는 단어 용어 장르를, ‘아랑가’로 대체해야 한다. 신작명(新作名)을 하더라도 본질은 같다.
‘아리랑+가요’= ‘아랑가’이다. 우리 전통가요 창법과 감흥과 감성의 덩어리는 ‘아랑가’이다.
[유차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교수
이메일 :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