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반의 시대다. 이 겨울 배반당한 자들은 이불속에서 꺼이꺼이 울며 밤을 보내고 배반한 자들은 승리자인 척 나댄다, 배반은 사랑의 동의어처럼 붙어 다닌다. 배반은 수많은 문화콘텐츠를 생산해 낸다. 배반의 장미, 배만의 계절, 배반의 축배, 길의 배반, 배반당한 혁명, 배반의 여름, 배반의 바다, 언어의 배반 등 참 많기도 하다.
아마 배반은 우리 인생에 다반사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는 쓴맛이다. 정치가들의 배반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평생 갈 것 같았던 동지도 등에 칼을 뽑고 배반하며 자신의 이익을 좇는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믿었던 동업자에게 배반당해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 앉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뿐이랴. 동창에게 배반당하고 친구에게 배반당하고 심지어 가족에게 배반당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빌어먹을 세상이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를 배반하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배반한다. 종교는 종교를 배반하고 지구는 지구를 배반한다. 그 거시적인 배반이 아니더라도 삶은 나를 배반하고 나는 또 나를 배반한다. 배반이 없다면 인간은 성장하지 못한다. 배반으로 잘못된 것을 찾아 고치려고 하고 배반을 거울삼아 다시 일어서며 배반으로 자신을 성찰한다. 배반의 다른 말은 성찰이다. 그 성찰은 인간성을 되찾아 주는 정신의 알고리즘이다. 배반은 나약한 정신을 곧추세워 자신의 실체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니 배반의 다른 말은 신의가 아니라 성찰이다.
‘낙타는 사람을 배신하는 동물이라서 수천 리를 걷고도 내색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꺾고 숨을 놓아버린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낙타다’라고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책 ‘연금술사’에 말했다. 또한 엘리노어는 ‘누가 당신을 한 번 배신했다면 그 사람 탓이고 두 번 배신했다면 당신 탓이라’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인연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대가를 받는 벌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배반으로 얼룩지고 다시 사랑으로 치유하는 과정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영화 각본가인 자크 프레베르의 시 ‘배반당한 애인들’은 세 줄의 짧은 문장 속에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나는 램프를 가지고 있었고
너는 빛을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심지를 팔아 버렸는가
램프를 밝히던 심지, 빛을 밝히던 심지는 누가 팔아버렸을까. 심지를 판 자는 누구일까. 그자는 ‘나’며 ‘너’며 ‘우리’다. 우리는 때때로 심지를 팔아버리고도 판지도 모른다. 그게 심지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심지, 질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심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심지를 구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천지 분간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나를 찾아 나선다. 심지는 저 깊은 마음속에 숨어서 사사건건 고개 쳐들고 나오려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크 프레베르의 주변에도 심지를 팔아버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램프를 가지고 있었고 너는 빛을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심지를 팔아버렸는지 알 수 없다. 램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팔았을까. 아니면 빛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팔았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귀신이 심지를 팔았을까. 관념으로 심지를 팔았든 실체로 심지를 팔았든 심지는 결국 우리 가슴에 있는 마지막 양심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든 어느 사회든 우리는 끊임없이 심지를 사고팔며 살아간다.
오죽했으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배반한다면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것과 같다고 일찍이 솔로몬은 말했다. 배반당하는 자는 배반으로 인해서 상처를 입게 되지만 배반하는 자는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마련이다고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셰익스피어가 극본을 쓰고 극단에 들어가 그 잘난 옥스퍼드대학 출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견디며 배반을 밥 먹듯이 당했다. 그러나 문학과 철학에서 신화가 된 그의 작품들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자크 프레베르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1900년에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192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로 퍼진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어울려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뜻이 맞지 않아 초현실주의 모임을 탈퇴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렸다. 시나리오와 샹송 가사를 쓰면서 시집 ‘말’을 출판해서 단박에 유명해진다. 그 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샹송 ‘고엽’을 쓰고 세계적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다. ‘고엽’은 죽은 나무라는 뜻인데 우울하면서 아름답고 허무하면서도 서정적이며 퇴폐미가 서려 있는 가사다. 자크 프레베르의 작품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것이 ‘고엽’이다.
‘배반당한 애인들’은 제목에서부터 선정적이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 같아 몰입된다. 배반당하고 배반하는 일을 일생에 몇 번 겪지 못하는 일이지만 오늘도 누군가는 배반에 울고 누군가는 배반에 이를 갈며 누군가는 복수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심지를 팔아먹었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오늘 밤이 어두워도 새벽은 온다.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심지를 팔아먹었던 것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그게 삶이니까. 누가 심지를 팔았는지 뒤끝에 매달려 살다가도 어느날은 잊게 된다. 원래 심지 같은 건 없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자크 프레베르 말한다.
누가 심지를 팔아 버렸는가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