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벗겨지면 안 되는 마지막 옷을 입고 있는 듯
놓으면 떨어지는 벼랑 끝의 나무를 잡고 있는 듯
제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운 초봄의 나뭇가지에 기대고 있는
3월의 꽃봉오리는 그렇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벚꽃이 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건만 그 꽃봉오리들은 이른 아침 얇은 각질에 싸여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 추워 보이는 봉오리가 껍질을 꼬옥 붙잡고 있습니다.
쌀쌀했던 지난밤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겨울을 지내고 희망처럼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를 보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어느 해 봄날 수줍은 듯 발그스레한 꽃봉오리를 따서 찻잔에 띄웠던 적이 있었지요. 따뜻한 찻잔 속에서 살포시 꽃잎을 열던 벚꽃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목련은 우윳빛 속살을 드러낼 듯 말 듯합니다. 지난해 봄, 하얀 꽃을 예쁘게 피워서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던 꽃. 나는 그 꽃을 사모하는 여인인 양 마냥 그리운 눈빛을 보내었습니다.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나를 현혹한 그 꽃은 짐짓 딴청을 피우는 여인처럼 담담히 내 그리움을 삼켰습니다. 하얀 목련이었습니다. 그 순결하고 부드러운 속살! 어느 여인이 그리 고운 속살을 가졌을까. 목련은 우아한 여인입니다.
꽃은 핀 것도 좋지만 피기 전 수줍은 듯 맺혀 있는 모습은 미완성의 아름다움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 아침에도 며칠 사이 아침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봉오리 맺힌 꽃들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서둘러 봄을 불러오려는지 3월이 되기도 전에 진홍빛 껍질 주머니 속에 콩알 만 한 흰 봉오리를 맺고 있던 매화는 피었고 벚꽃 봉오리도 다투어 꽃잎을 틔울 준비를 합니다.
참으로 부지런한 꽃들의 행보! 이름을 아는 많은 꽃나무 사이에 사과나무와 비슷한 이름 모를 나무가 하나 눈에 띕니다. 연노랑 꽃이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 피어 있긴 한데 무슨 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쁘긴 합니다. 식물도감이라도 뒤져서 그 여린 꽃나무 이름을 알아보아야겠습니다.
녹색 잎이 겨우 맺혀 있는 그것은 모과나무입니다. 꽃봉오리가 아니라 잎 봉오리라는 표현이 옳을 듯합니다. 연초록 잎들이 송송 올라와 있는 모습이 참으로 탐스럽습니다. 더욱이 늦봄쯤에는 연분홍색 꽃으로 피어나니 참으로 신기할 뿐입니다. 가을에는 은은한 향기를 가져다주는 열매를 맺는 모과나무는 생김새가 그리 매끄럽지 않습니다. 못생긴 여자를 빗댈 때 쓰이기도 하지만 겉모습은 그러하더라도 마음씨가 그처럼 향기롭다면 무에 그리 탓할 바이겠습니까. 향기로 우리의 코끝을 즐겁게 해 주니 더욱 고마울 뿐입니다.
애기사과나무는 쌀눈만 한 크기로 진분홍색의 꽃봉오리가 맺혀 있습니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껍질에 싸인 채 반쯤만 눈을 내민 채로 보일 듯 말 듯한 모습으로 봉오리를 맺고 있습니다.
차를 몰아 달려가는 해안도로는 따스한 봄볕에 기지개를 켜는 듯합니다. 바닷가에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가 놓여 있습니다. 작년 봄에 그 아래로 유채 꽃밭이 길게 펼쳐져 있습니다.
아직은 초록빛 잎사귀들로 싸여 있습니다만 그 사이로 철모르는 꽃봉오리 몇 개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어느새 노란빛을 살포시 보여주는 꽃망울은 성급하나 귀여운 아이 같습니다.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껍질은 머지않아 유채꽃 그 노란 빛의 허물이 되겠지요.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