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회의 순간이 썰물처럼 밀려오면 갈팡질팡하는 도돌이표를 자를 가위를 꺼내야 할 때다. 그것을 연장자는 부끄럽지만, 막내가 대견하게도 해낸다. 엄마의 생신을 맞아 우리는 제주도를 꺼내 들었다. 명분 있는 여행이니만큼 흔쾌히 따라나설 것이라 엄마를 지레짐작하고, 말랑말랑해진 가슴안 색종이가 벌써 수수깡을 세우고 바람개비를 둥글게 접는다.
걷기만큼은 큰딸을 앞질러 안심케 한 작년과 달리 급격히 저하된 체력을 절감한 엄마는 야속한 멀미가 따라붙었다. 관절에 문제가 터졌음에도 곧추세워 걷기를 실천해온 엄마. 마음은 아직 저물지 않았는데 몸이 점점 따로 노는 불협화음으로 어깃장을 놓는다.
말해 뭣하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새끼들과의 여행인데. 행여나 생때같은 자식에게 한순간이나마 심장의 제동기가 되진 않을까. 앞선 마음이 잠시 들뜬 하늘을 잡아 내린다. 제주도가 부풀린 꿈은 주연 배우의 캐스팅 거절 표시로 픽, 설렌 표정에서 헛바람이 빠지고 만다.
가장 오래 엄마와 살았던 경험은 큰 몫을 하는구나. 허를 찌르는 예약과 선입금으로 시동을 걸다니. 이보다 강한 스파이크는 없다. 지혜롭게 영리한 막내는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에 바닷물의 결을 가르는 모터보트를 장착했다. 취소 위약금이란 이마를 동여맬 금전 손실은 시간차 공격처럼 위협적이다.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엄마의 마음을 꿰뚫은 날카로운 통찰로 꿈이 현실과 대류 하고야 만다.
낮의 끝에 떠오른 오색의 황혼은 더 짙게 꽃피우는 불꽃같다. 햇볕에 비친 내 옆얼굴을 보고 놀라신다. 깨끗하던 피부에 드리워진 시간의 그늘을 발견한 것이리라. 하나둘 속에서 올라온 점들이 불꽃 앞에서 감히 존재를 드러내고야 만다. 함께 피부과에 가서 점을 빼잔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리송한 표정이 뭉클하게 해사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살자 했다. 귀엽게 발끈하신다. 마음은 늦은 봄에서 멈추고 둘러보는데, 노화만 가을에서 더 질주하려는 속도의 차이를 어찌할까.
여행은 어른의 시간을 거꾸로 돌게 한다. 뭍과는 사뭇 다른 섭지코지의 바람과 묵은 속을 빼가는 현무암, 꼬리를 늘어뜨려 땅과 바다의 경계를 허무는 말, 머리칼을 잡아끄는 봄을 품은 바람이 잔잔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하늘과 바다에 금을 긋고 싶지 않은 수평선이 손짓한다. 바다와 구름이 접속하는 사이 어딘가 우리가 있다. 이에 갑자기 하늘에 무늬를 그리며 나선, 패러 글라이딩의 모터 소리는 자진모리장단처럼 발걸음을 춤추게 한다. 관절염이 생겨 조심스러운 엄마도 리듬 어린 유혹에 스스로 넘어가 한 폭의 그림에 들어간다. 젊어진 입가에 부드러운 곡선이 유려하다.
남은 뒤란이 제각각인 삼대는 깊이는 다르나 폭은 같은 길을 걷는다. 계단 한 줄로 타고 올라간 정상에서 내려다본 절경이 뭍에서 들러붙은 피로의 냄새를 휘발한다. 여인이 풀어놓은 삼단이 생기를 눈가에 바른다. 전환점을 바라보는 딸, 앞길이 구만 리인 열 살, 기약할 수 없는 앞길이 아련한 황혼은 검은 바위를 에워싼다. 새끼 돌고래가 꼬리로 바다를 살살 흔드는 재롱만 같아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얕은 눈망울의 물거품과 깊은 바다는 우리들의 다른 시간의 추를 따라 감속과 가속으로 따라 걷고 있다. 잠시 풍경에 앉아 쉬었다 일어설 때면 어긋난 무릎이 시난고난 한 세월을 읊어준다. 지난해 차에서 내릴 때 덜걱거린 다리로 철렁한 가슴을 부여잡았던 적이 있다. 운동 기능은 내년을 감히 기약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라 한다.
쇠잔한 기동력과 따로 노는 정신력의 간극을 메울 수는 없을까. 수없이 바위에 몸을 던져 부서지는 흰 포말이 결국 바위를 둥글게 요리한다. 오랜 담금질에 무쇠가 되듯 우리는 세월의 언어를 차곡차곡 쌓은 노년엔 다이아몬드가 되리라. 왜소해지는 몸집과는 달리 더 깊어진 눈망울이 아직도 당신의 몸보다 우리의 무사안일에 빛을 낸다.
아픔을 잊은 채 현무암을 때려 누르는 파도가 엄마의 홀로 이겨낸 질곡의 시간만 같다. 바라보는 가냘픈 산수의 뒤태가 애잔하다. 우리 가슴에 훈풍이 분다. 우리 삼대의 추억이 될 앨범의 한 장에서 잊지 못할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