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는 사람 중에 악한 사람은 없다. 눈물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 없는 눈물에 진짜 거짓을 섞어 우는 사람도 있다. 이건 눈물 잘못이 아니다. 눈물은 죄가 없다. 우는 사람이 죄가 크다. 눈물은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감정의 조련사다. 눈물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눈물에는 복잡한 논리가 없다. 조용한 감탄의 정서가 밑바탕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이 없는 사람은 냉혈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눈물은 마음에 새기는 해인 같은 것이라고 믿으면 한결 따뜻해진다.
영국남자 바이런은 ‘그대 울었지’를 통해 우리 감정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다. 그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 오래된 순수함을 다시 꺼내서 말없이 바라보며 감정의 파문을 일으키게 만든다. 삶의 속도에 휘둘렸던 어지러움을 잠시 멈추고 잔잔한 감정의 파문 끝에 있는 순수와 대적하게 한다.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소용돌이치며 끌고 가는 어지러운 역사의 순간들도 천천히 멈춰서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해준다. 아무리 정치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아도 아무리 경제가 바닥을 쳐도 결국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이듯이 바이런은 ‘그대 울었지’를 통해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
나는 보았지, 그대 우는걸
커다란 반짝이는 눈물이
그 푸른 눈에서 솟아 흐르는 것을
제비꽃에 맺혔다 떨어지는
맑은 이슬방울처럼
그대 방긋이 웃는 걸 나는 보았지.
그대 곁에선 보석의 반짝임도
그만 무색해지고 말아
반짝이는 그대의 눈동자
그 속에 핀 생생한 빛을 따를 길이 없어라
구름이 저기 저 먼 태양으로부터
깊고도 풍요한 노을을 받을 때
다가드는 저녁 그림자.
그 영롱한 빛을 하늘에서 씻어낼 길 없듯이
그대의 미소는 침울한 이내 마음에
그 맑고 깨끗한 기쁨을 주고
그 태양 같은 빛은 타오르는 불꽃을 남겨
내 가슴 속에 찬연히 빛나노라.
바이런은 ‘그대 방긋이 웃는 걸 나는 보았지’라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의 섬세한 흐름과 미의 본질에 대한 존재의 리듬을 드러내고 있다. 그대는 바로 당신이며 나다. 어머니이며 누이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울음 끝에 매달려 나오는 눈물에 유영하다가 이내 웃음으로 승화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해석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는 마음이 곧 사랑이다. 우리는 의미와 판단으로 세상을 재단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이름 붙이기 어려운 사랑이 도사리고 있다.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울고 나면 웃게 되고 웃으면 울음이 찾아온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바이런은 울었던 그대가 다시 웃는 걸 본다. 이 직관적인 시가 주는 깨끗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바로 바이런의 매력이다. ‘그대 울었지’라는 제목과 달리 눈물이나 슬픔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시인이 바라보는 여성의 조용한 아름다움, 말 없는 정서 밑바닥으로 흐르는 경건한 감정이 울 듯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1788년생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이다. 영국 문화가 그렇듯이 자유분방하고 유려한 정렬의 시를 써서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요즘 케이팝 아이돌 버금가는 인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인으로 명성을 얻고 유럽 대륙을 방랑하며 자유롭게 살았지만, 그리스독립전쟁에 지원 입대해서 전쟁통에서 객사하고 만다. 객사는 어찌 보면 시인에게 훈장 같은 것일지 모른다. 자유로운 영혼들은 죽음까지도 자유로운 것인가 보다.
바이런이 주고 간 시들을 읽으며 봄밤을 방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아보는 날들도 있어야 그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 아등바등 산다고 천년을 살겠는가. 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 아니던가. ‘그대 방긋이 웃는 걸 나는 보았지. 그대 곁에선 보석의 반짝임도 그만 무색해지고 말아 반짝이는 그대의 눈동자 그 속에 핀 생생한 빛을 따를 길이 없어라’고 찬미할 수 있는 봄밤이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바이런의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말없이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가.”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