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섹스를 보라. 마라톤만큼 시 쓰기만큼 단순하고 오래된 경기지만,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외로우나 뜨겁기 때문이다.
- 윤제림,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부분
오래전 교직에 있을 때 토요일이 되면 지쳤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피로한 게 아니었다. 우리 사회는 ‘피로 사회’가 아니다. 피로는 쉬고 나면 풀린다. 다시 생기가 돋아 말갛게 일어서게 된다.
하지만 소진은 다르다. 기(氣)가 다 빠져나간 상태다. 기가 없이 껍데기로 살아가는 삶이다. 왜 그럴까? 기를 운용하지 않고 살아서 그렇다. 기를 운용하려면.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
의식(意識)은 의지와 식이 합쳐진 말이다. 의지는 무언가를 하려는 내적인 힘이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힘이 솟아나지 않는 삶.
그러한 삶을 오래 살다 보면,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사라진다. 의지가 없으니 새로운 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식은 아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 때, 매번 다르게 본다. 그런데 다르게 보려는 의지가 없으면, 그 무언가는 항상 ‘똑같이’ 보인다.
세상은 언제나 똑같다. 무한한 반복. 시시포스의 형벌이다. 현대인은 모두 죄수다.
시인은 왜 ‘섹스, 마라톤, 시 쓰기’ 세 경기의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반복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외로우나 뜨겁기 때문이다).
그 경기의 참가자들은 늘 의식이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기에서 탈락하기 때문이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