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충사에 보관된 국보 76호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충무공 이순신의 유물이다.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는 이들과 함께 보존되어 온 책으로서 기존에는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책 내용 앞부분에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고 쓰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책 표지에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라고 쓰여 있고 내용도 충무공과 관련된 것이므로 나중에 책 이름이 『충무공유사』로 바로 잡혔다.

『충무공유사』는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과 현충사관리소에 의해 번역되어 2008년 국역본과 영인본을 합본하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앞부분에 수록된 해제에 따르면, 『충무공유사』는 1693년 전후로 쓰인 자료로서 기록자는 충무공 가문과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책에 수록된 내용은 재조번방지초, 정읍사우 상량문, 춘추제향문, 삼도회문, 상소문, 일기초, 왜란에 참가한 장졸의 명단, 중국 장수가 준 물품 목록, 기타 등 총 9가지이다.
필자는 『충무공유사』 수록된 내용 가운데 '왜란에 참가한 장졸의 명단'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다(편의를 위해 이를 아래에서는 간단히 '인명록'으로 칭한다). 인명록은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옮겨 적은 일종의 명단 자료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명록에 기록된 이름의 순서는, 대체로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름이 등장하는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난중일기』가 연도에 따라 별책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명록의 이름도 연도별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난중일기』에 기록된 인명의 오기는 인명록에도 그대로 답습되며, 『난중일기』에 이름 대신 자(字)로 기록된 인명이 인명록에도 똑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은 『난중일기』에 오기된 이름의 예으로서 인명록에도 오기가 똑같이 나타난다.
『난중일기』 1593년 2월 16일: 정원명(鄭元明) - ‘鄭元明’은 ‘鄭元溟’의 오기이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30일: 문어공(文語恭) - ‘文語恭’은 ‘文於公’의 오기이다.
인명록은 주로 양반과 양민 위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충무공의 친인척이나 천민/노비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 수군에서 활약하였거나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양반과 양민 중심으로 기록한 듯하다. 인명록이 연도별로 기록한 이름의 숫자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명록은 『난중일기』의 등장인물을 연도별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1593년과 1594년 두 해의 인물 명단은 합해서 기록하였다. 인명록이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옮겨 적은 자료이니, 언뜻 보기에 큰 가치가 없는 자료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명록은 『난중일기』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이 나타나는 점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명록의 1592년, 1596년, 1597년 자료에 나타나는 이름은 모두 『난중일기』의 해당 연도 기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인명록의 1593~1594년, 1595년, 1598년 자료는 각각 2명, 9명, 42명의 이름이 『난중일기』의 해당 연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593~1594년 자료의 경우는 이입부(李立夫: ‘立夫’는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의 자字)와 김효성(金孝誠)이 그 2명이다. 이 두 사람은 『난중일기』의 다른 연도 기록에는 등장하므로 간과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1595년 자료의 9명은, 그 가운데 7명은 『난중일기』의 다른 연도 기록에는 나타나지만 2명은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 이름이다. 해남감목관 박계지(海南監牧 朴繼之)와 김연복(金延福)이 그 두 사람이다. 『난중일기』의 1595년 일기는 현재 그 원문이 남아있지 않고,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 사본만이 전한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 사본은, 원문의 상당 부분이 수정되거나 삭제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인명록에 언급된 박계지와 김연복은 『난중일기』의 원문에 등장하는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인명록의 1598년 자료는 51명 가운데 42명이나 되는 많은 이름이 『난중일기』의 1598년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서 특히 주목된다. 이들 42명 가운데 상당수는 『난중일기』의 다른 연도 기록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는 이름이다. 예를 들어 낙안군수 방덕룡(樂安郡守 方得龍: 方得龍은 方德龍의 오기), 나주목사 남유(羅州牧使 南瑜), 함평현감 송섭(咸平縣監 宋涉), 무장현감 나덕신(茂長縣監 羅德愼)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 네 사람은 다른 여러 사료를 통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 참전했음이 입증되는 인물이다. 이를 통해 인명록의 1598년 자료에 기록된 이름이 『난중일기』의 1598년 원문에서 옮겨 적은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다음은 위 네 사람이 노량해전에 참전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낙안군수 방덕룡
1. 『선조실록』 권106, 선조31년-1598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 기사: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됨
나주목사 남유
1. 손기양, 『오한집』, 「일록」 1598년 12월 3일: 노량해전에서 탄환에 맞았다고 기록됨
2. 『나주군읍지』, 「선생안(先生案)」: 노량해전에서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고 기록됨
함평현감 송섭
1. 손기양, 『오한집』, 「일록」 1598년 12월 3일: 노량해전에서 함평현감이 전사했다고 기록됨
2. 송이석, 『남촌집』: 노량해전에서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고 기록됨
무장현감 나덕신
1. 이서우, 『송파집』: 이순신 휘하에서 노량에 참전했다고 기록됨
2. 『전선무장지』, 「관안」: 1598년 나덕신의 재임 사실이 기록됨
『난중일기』의 1598년 기록은 1월 5일 ~ 9월 14일까지 상당히 많은 분량이 현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1598년 10~11월 기록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사본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난중일기』의 1598년 원문은 많은 분량이 소실된 것으로 학계에서 추정되고 있다. 『충무공유사』에 수록된 인명록은 『난중일기』 1598년 원문이 상당 부분 소실된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충무공유사』가 1693년 전후로 쓰인 자료인 점을 고려하면, 『난중일기』 1598년 원문은 1693년과 『이충무공전서』가 출간된 1795년 사이에 상당 분량이 소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2008년에 출간된 『충무공유사』 번역본은 현재 한국의 지식콘텐츠(krpia.co.kr) 사이트에서 무료로 전자책 열람이 가능하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현충사관리소, 『충무공유사』, 현충사관리소, 2008
한국고전종합DB, 손기양(孫起陽), 『오한집(聱漢集)』 권4, 「일록(日錄)」
한국고전종합DB, 송이석(宋履錫), 『남촌집(南村集)』 권2, 「잡저(雜著)」
한국고전종합DB, 이서우(李瑞雨), 『송파집(松坡集)』 권13, 「묘지(墓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나주군읍지(羅州郡邑誌)』, 「선생안(先生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전선무장지(全鮮茂長誌)』, 「관안(官案)」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