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재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을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해야겠다는 마음 먹고 책을 정리하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약간 누렇게 빛바랜 책이었다.
20여 년 전 현대중공업 미국해운회사 선주감독 시절 무에 그리도 바빴든지 부산에서 울산으로 출퇴근하며 지나가는 길목의 친구 집에도 들르지 못했다. 잠시 쉬었다 갈 시간도 없었지만 그만큼 젊었으니 즐겁기도 했다.
때로는 울산의 숙소에 머무르는 평일 퇴근길에는 미국인들과 인도 사람들 속에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나는 그들과 어울려 어느 호프집에에서 자주 맥주를 마시곤 했다. 그때만 해도 영어가 그다지 서툴지 않은 언어였다.
호프집의 40대 초반의 여주인은 어쩌면 저렇게도 예쁘고 늘씬한 몸매를 가졌을까? 술을 한 잔 권하면 입에도 대지 못한다며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내가 습작으로 쓴 시를 프린트해서 주면 그토록 기뻐할 수가 없었다. 연말에 동인지 책이라도 한 권 주면 자신도 한 때 문학소녀였다며 소중하게 읽겠다고 했다.
그 여주인이 어느 해 연말 나에게 책을 선물했다. “오두막 편지”(법정 스님)였다. 책의 간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써 놓았다.
힘들고
어렵지만
가끔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
함께
있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십시오!
3일 후 그 호프집을 다시 찾았을 때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다음 날 나의 메일함에 낯선 메일 한 통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좋은 시를 읽게 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저의 이승에서의 시한부 인생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건강하십시오.
그 이후로 나는 그 여주인에 대한 어떠한 소식도 들은 적이 없고 만난 적도 없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틀을 돌리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일본 지사장으로 일본에서 근무했으니 더욱 잊고 있었다.
책을 정리하면서 손 한 번 잡은 적 없고 안아 본 적도 없는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여인이 준 이 책만은 버릴 수 없는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시작도 하지 않았던 인연의 시작이 곳간의 이별로 남아 있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