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상에 우뚝 선 독서 등이 살포시 나를 굽어본다. 투명한 독서대에 비스듬히 기댄 나른한 책을 천천히 더듬는다. 시력이 저하된 한밤에 글자를 훑을 수 있는 조력자가 있으니 흐뭇하다.
먹빛 진담으로 한동안 적적하던 가경천변이 어째 시끌시끌 문전성시를 이룬다. 겨우내 입던 살집이 잡히는 어두운 옷을 남긴 나를 꾸짖는 듯하다. 며칠 전 스쳤을 때만 해도 싸늘함은 여전했건만, 고새 곱게 화장하곤 변신에 성공했다. 여태 겨울잠에서 덜 깬 나만 어둡게 천변을 걸어간다. 화사한 풍경의 이마에 가로줄을 긋는 애물단지 같다.
저녁엔 뭘 해 먹나. 이런 고민하는 나는 알약으로 모든 영양소를 대체할 끼니를 개발하고픈 주부이다. 조금 멀어도 시장에 걸어가는 중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못 보던 작고 발랄한 조명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 참새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있다. 따라 걷고 싶은 ‘낭만의 거리’란 조형물이 새하얀 앞니를 보여준다. 아치형 다리 옆에는 버스킹 Busking 할 수 있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밤에 공연을 즐길 수도 있겠다. 봄바람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든다. 대낮이라 그럴까. 야단법석을 떠는 참새들의 천진한 비행이 사라졌다. 자동차들의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만이 크게 와닿는다. 밤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점심을 거른 오후가 저녁을 욱여넣는다. 아삭한 상추에 매콤한 쌈장으로 한 입 크고 야무지다. 소화도 시킬 겸 낭만의 거리로 나가볼까. 시시각각 변하는 밤의 표정에 오가던 발길이 헤벌쭉해져서 근육이 풀어진다. 반려 강아지도 설렌, 속눈썹을 깜박이는 가로등 아래 살구꽃이 혈관까지 눈부시다. 앉은뱅이 조명 뒤에서 수선화가 얼굴을 쏙 내민다.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꽃을 불빛이 주시한다.
칠흑이 덮은 풀숲은 은밀한 이야기를 속닥거린다. 나무에 기댄 가로등이 치인다. 꾸벅이는 모양새가 몰려오는 졸음에 겨운 듯하다. 분위기에 쏠려 어느새 낭만의 거리가 끝나가는 지점에 다다랐다. 길바닥의 미약한 존재가 어둠 곁에서 모처럼 휘황하다. ‘당신의 지금에 어제의 낭만이 닿기를.’ 맞닿은 시선에 온몸이 반짝인다. 낮과는 딴판인 불꽃놀이 못지않은 렌즈들이 집중포화를 퍼붓는다. 대낮은 조명들을 내리눌러 색을 지웠다. 짙은 어둠 중앙에서 전기가 들어와 투명한 조명의 정맥을 드러낸다. 허공을 찌르는 필라멘트가 한때의 나를 발광한다.
달갑지 않은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한동안 소원할 책을 도서관에서 더 열심히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이라도 끝까지 완주했다. 사방이 캄캄한 나의 세계에서 그나마 숨구멍이 트이는 책이 큰 병원에서 찾은 누구 같았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 닿아 대견하게 포착됐나 보다. 나의 세계에 등불이 켜졌다. 학교 대표로 교육도서관에 매일 아침 출근하게 되었다. 오전 내내 책을 읽고 나누어주는 간편 점심을 먹었다. 하나둘씩 독후감을 발표한 후 귀가했다. 담임 선생님의 재추천으로 겨울방학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방학 때면 으레 하루나 이틀은 있는 학급 소집일에도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오로지 담임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음이리라.
어둠은 빛 한줄기에 쉽게 물러난다. 그 이끌림으로 나는 고립된 세계에서 밖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둠에서 가장 어려운 배역은 그늘인 것만 같다. 밝음에 쉽게 끌릴 수 없는 끈적한 그림자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손전등을 들고 머리를 기울여 낮은 자세로 비추어야만 그 끈끈이를 떼 낼 수가 있다. 내가 깊은 그늘에 짓눌려 있을 때 전등은 스스로를 부수어 날 비추었다. 도서관의 형광등은 사방으로 흩어져 바스러진 입자로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어린 내가 좌절하지 않게. 웅크리지 않게. 눈물겹지 않게. 멈추지 않게. 오래 참을 수 있게.
저녁의 중심으로 모여든 어둠의 한구석에 연인이 꼭 붙어 앉아 있다. 오수의 입꼬리가 흘린 낭만이 조명 옆 의자에 잔뜩 고여있다. 어둠과 빛의 대치가 팽팽하다. 어둠 속에서 빛의 내공이 드러난다. 반짝반짝 빛날 내일을 넌지시 응원하고 있다.
내일을 꿈꾸는 그늘의 창 안쪽에서는 눈빛이 좌우로 분주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경쾌하다. 사락거리는 종이는 은하수에 흐르는 헤라의 젖이 아까워 밤을 한 쪽씩 아껴 먹는다. 밤이 흔쾌히 물러나기엔 하늘 위에서 빛 내리는 어린 별이 총총하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