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릿고개를 겪던 때가 엊그제였는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1년 우리나라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래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처음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수출 순위 세계 6위(2024년), GDP 순위 세계 14위(2024), 그리고 2017년에 국민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어섰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도로에서의 운전자들의 운전 습관은 여전히 후진국 행태(行態)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창피하고 안타깝다.
아침 이른 시간, 도로에 나서면 늘 다짐한다. 오늘은 평온하고 배려심 있는 운전자들만 만나기를…. 그러나 마음속 소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칼에 무너지고 만다. 왼쪽 깜빡이도 없이 휙 끼어드는 차, 추월 차선에 느긋하게 눌러앉아 주행하는 차,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툭 던지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라지는 운전자. 이쯤 되면 분노보다 허탈감이 앞선다. 도로 위에서의 양심은 이제 선택사항이 된 모양새다.
얌체 운전자는 단지 차량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넘어, 타인의 생명과 안전을 노골적으로 위협한다. 과속을 일삼고, 신호는 무시하며, 안전거리란 말조차 모르는 듯한 뼘 뒤에서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는 뒤차는 공포 그 자체다. 이들이 몰고 다니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언제든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흉기다. ‘주정차 구역, 회전 교차로, 소화전 앞’, 이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표시들이다. “내가 여기 세운다고 누가 죽기라도 해?”라는 무책임한 사고는 결국 누군가의 긴급한 골든타임을 빼앗고, 교통체증이라는 시간의 도둑질로 이어진다. 이기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피해는 모든 운전자의 하루에 고스란히 각인된다.
음주 운전은 또 어떤가. 음주 운전은 단순한 교통법규 위반이 아니라, 예고된 살인행위와 다를 바 없다. 술기운에 흐려진 판단력과 반응 속도로 수 톤의 쇳덩이를 운전한다는 것은,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도로 위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차가 아닌 흉기를 겨누는 일이다. 실제로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고는 거의 매일 반복되고, 그 피해는 단지 피해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순간의 비극은 곧 한 가족 전체의 삶을 무너뜨린다. 아무 죄도 없는 이가 길을 걷다, 차에 치여 의식을 잃고, 평생을 병상에서 보내게 되는 일은 결코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남겨진 가족은 병원비를 걱정하며 감정의 붕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반대로 가해자 역시 "괜찮겠지"라는 무책임한 선택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전락하고 본인 인생은 물론 가족의 명예까지 송두리째 짓밟아버리고 만다.
윤창호법이라는 법적 장치가 존재하지만 음주 운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단속 정보를 피해 다니고, 혈중알코올농도 수치를 교묘히 계산하며 ‘걸리지 않을 정도만 마셨다’라는 위험한 착각이 만연한 탓이다. 그들은 잊고 있다. 음주 운전 사고의 대부분은 ‘딱 한 잔’에서 시작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이 같은 근본 문제의 뿌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1~2시간 교육만 받아도 손쉽게 취득할 수 있는 운전면허, 위반해도 그저 벌금 몇만 원 내면 그만인 솜방망이 처벌, 그리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알게 모르게 팽배해 있다. 모두가 자유롭게 운전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 자유는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선까지여야 한다. 그러나 도로 위엔 마치 전용도로인 듯 거침없이 질주하고, 혼자만 급한 듯 끼어들기를 일삼는 운전자들이 넘쳐난다면 심각한 문제다. 이들은 규칙을 무시하면서도 정작 불편한 건 옆 사람 몫이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다.
진정한 선진국은 도로 위 질서에서부터 드러난다. GDP가 아무리 높아도, 건널목 앞에서 멈추지 않는 운전자, 고속도로에서 방향지시등도 없이 갑자기 끼어드는 습관을 지닌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말로는 '선진국 국민'이라 자부하면서, 운전석에만 앉으면 양보도 배려도 사라지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장 아픈 자화상이다.
이제는 진짜 변화가 필요하다. 면허 취득 과정을 더욱 엄격히 하여 최소한의 운전 윤리조차 체득하지 못한 채 도로에 나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 3년 이상의 단계별 교육을 거치는 뉴질랜드 사례처럼, 면허는 단순한 자격증이 아닌 '책임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운전자의 시민의식을 높이기 위한 윤리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반복적 위반자에 대해서는 면허 정지나 취소 등 실질적 불이익이 따르게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보다 더 깊은 변화, 우리 각자의 마음속 변화다. “양보하면 내가 손해다”라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나 하나로 누군가가 조금 더 안전할 수 있다”라는 자각을 가질 때, 우리는 ‘운전’을 넘어 ‘공존’을 선택하는 셈이다. 신호 하나를 지켜낸 나의 30초가, 누군가에겐 소중한 하루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윤배]
(현)조선대 컴퓨터공학과 명예교수
조선대학교 정보과학대학 학장
국무총리 청소년위원회 자문위원
호주 태즈메이니아대학교 초청 교수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이메일 : ybl773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