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 관련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료는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의 경과를 이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전투나 군사 관련 업무 등을 장계로 작성하여 조정에 보고 하였다. 충무공이 작성했던 장계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사본이 여럿 현전한다. 그 가운데 『충민공계초』, 『임진장초』,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장계」 세 가지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서점이나 역사 관련 사이트 등을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충무공의 장계는 조선 수군의 전투 또는 관련 활동에 대해 매우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역사 연구 자료로 평가된다. 하지만 한 개인이 작성한 기록이므로 일부 주관적인 관점이 담겨 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충무공의 장계는 역사를 기록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서(史書)'가 아니라 전투 관련 내용 등을 보고하려는 목적을 가진 '보고서'라는 점이다.
조정에 어필하기 위한 내용은 강조될 것이고, 보고에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내용은 전부 또는 일부가 생략되기도 할 것이다. 즉, 충무공의 장계는 그 내용이 사실과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글이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첫 출전에 대한 장계인 「옥포파왜병장」에 나타난 1592년 5월 4일의 전라좌수군 이동 상황과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만 비교해보더라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옥포파왜병장」
(1592년 5월 4일) 여러 장수들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경상우도의 소비포(지금의 경남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 소을비포진성) 앞 바다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으므로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4일
날이 밝아올 무렵 배를 출발하여 곧장 미조항 앞바다로 가서 다시 약속하였다. 우척후장, 우부장, 중부장, 후부장 등은 오른편으로 들어가 개이도를 수색하고, 그 나머지 대장선은 함께 평산포, 곡포, 상주포, 미조항을 지나갔다.
「옥포파왜병장」에 나타난 1592년 5월 4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수군은 하나의 함대로 이동하여 경상우도 소비포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나타난 같은 날 기록은 조선 수군이 두 개의 함대로 나뉘어 주변을 수색하면서 나아갔다고 서술하였다.
「옥포파왜병장」과 『난중일기』의 기록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울까? 함대 이동 상황은 전투 경과나 전투 전과에 비하면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함대 이동 상황을 굳이 개인 기록인 일기에 사실과 다르게 적을 이유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보다는 보고서의 내용을 명료하게 작성하기 위해, 함대를 둘로 나누어 수색한 부분을 「옥포파왜병장」에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충무공의 장계와 『난중일기』의 기록 차이는 이뿐만이 아니다. 다음은 1594년에 벌어진 제2차 당항포해전에 관한 것으로서 이러한 차이점이 나타나는 또 다른 기록이다.
「당항포파왜병장」
(1594년) 3월 3일 미시(오후 1~3시)에 도착한 벽방(지금의 경남 고성군 벽방산)에서 망보는 장수 제한국 등의 급보에 "금일 날이 밝을 무렵 왜의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이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21척은 고성땅 당항포로, 7척은 진해땅 오리량으로, 3척은 저도로 향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난중일기』, 1594년 3월 3일
유시(오후 5~7시)에 (도착한) 벽방에서 망보는 사람의 급보에 “왜선 6척이 오리량, 당항포 등으로 들어와 나뉘어 정박하였다.”라고 하기에 곧바로 전령하였는데 <<후략>>
「당항포파왜병장」에 나타난 1594년 3월 3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왜선 총 31척이 당항포와 오리량 등으로 향했다는 급보가 미시(오후 1~3시)에 충무공에게 도착했다. 이에 비해 『난중일기』의 같은 날 기록은 왜선 총 6척이 당항포와 오리량 등에 정박했다는 급보가 유시(오후 5~7시)에 충무공에게 도착했다고 서술하였다. 즉, 두 기록은 왜선 규모와 급보 도착 시간에 대해 서로 다른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난중일기』의 1594년 3월 3일 이후 기록을 살펴보면 3월 3일 일기에서 언급된 왜선 6척 이외에도 다른 왜선에 대한 언급이 두어 차례 더 나타나는데, 그 숫자를 모두 합하면 31척에 가까운 규모가 된다. 이 점을 바탕으로 하여 추정해보면, 아마도 충무공은 「당항포파왜병장」을 작성할 때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 왜선 함대를 한꺼번에 나타난 것처럼 서술한 것 같다.
어느 전쟁이 되었든 전장에서 전개되는 전투 상황은 대부분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충무공은 제2차 당항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조정에 간단명료하게 보고할 목적으로 당시 상황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당항포파왜병장」을 작성한 듯하다.
충무공의 장계는 훌륭한 임진왜란 사료이지만 완벽한 기록은 아니다. 애당초 어떤 사실을 있는 바 그대로 글로 옮겨 적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이는 완벽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복잡한 전쟁 상황을 기록한 사료라면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난중일기』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이다.

충무공의 장계나 『난중일기』의 기록에 대해 비판하거나 내용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금기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 기저에는 충무공이 훌륭한 인물이므로 충무공의 기록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인식을 강요하는 생각이 존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역사 인식에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충무공을 선양하는 일에도 걸림돌이 된다.
임진왜란은 조선, 명, 일본 세 나라가 16세기에 벌인 대규모 동북아시아 전쟁이다. 이 전쟁을 기준으로 조선의 역사는 조선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며,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중국은 명이 청으로 교체되었으며, 일본은 도요토미 정권에서 도쿠가와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최근 한, 중, 일 세 나라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동북아시아 역사를 바꾼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충무공의 장계와 『난중일기』 또한 학술적(또는 과학적)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내용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 잡아 나아가야, 그 사료가 가진 가치가 더욱 올바르게 평가될 것이다.
- 이 글은 역사문화학회의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7권 2호(2024년)에 수록된 논문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임진왜란 초기해전 기록 고찰」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된 것이다. -
[참고자료]
이은상 역주, 『이충무공전서』, 1960, 충무공기념사업회
조성도 역, 『임진장초』, 2010, 연경문화사
국립해양박물관, 『충민공계초』, 2017, 민속원
윤헌식,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임진왜란 초기해전 기록 고찰」,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7권 2호, 2024, 역사문화학회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