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3개월 넘게 교착 상태에 있던 한·미 관세협상이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중 2,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입하고, 나머지를 민간 주도의 협력사업 형태로 진행하기로 한 이번 합의는 수출 불확실성을 완화하고 통상관계의 안정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자동차 관세가 25%에서 15%로 인하되고, 반도체·의약품·목재품에도 최혜국 대우(MFN)가 적용되는 것은 실질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번 협상은 단순히 관세율과 투자규모를 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급변하는 세계 통상 질서 속에서 한국이 어떠한 전략적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가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중국 중심의 공급망이 재편되고, 미국이 자국 산업의 부흥과 동맹국 투자를 병행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이제 ‘전략적 유연성’을 토대로 한 중장기 통상정책의 재설계가 절실하다.
Ⅰ. 외환안정과 금융 유동성 대응체계 강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환시장의 충격 최소화다.
연간 200억 달러 규모의 현금 투자는 단기간에 국내 자금시장에서 유동성을 흡수하며, 외환보유액의 감소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GDP 대비 약 22% 수준에 머무는 상황을 감안하면, 시장안정장치의 체계적 보완이 시급하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외화유동성 안정 프로그램(FSLP: Foreign Stabilization Liquidity Program)을 신설해 외환유동성 위기 대응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기획재정부 또한 외국환평형기금의 운용 기준을 개선하고, 시장 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외환정책 프레임워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한·미 통화스왑의 연장 및 다변화를 추진해 외환시장의 신뢰를 높여야 하며, 공공 및 민간 금융기관의 외화 차입 한도를 탄력적으로 운용해 자금시장 충격을 완화해야 한다.
나아가 정부는 외화조달 방식을 단기 차입 중심에서 벗어나 국부펀드 운용 확대, 해외 자산의 유동화, 그리고 다국적 금융협력 메커니즘 참여 등으로 다변화함으로써 외환안정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다층적 외환정책은 협상 타결의 단기적 충격을 흡수하면서 한국 금융시장의 신뢰를 중장기적으로 높이는 토대가 될 것이다.
Ⅱ. 국내 투자공백 완화를 위한 산업정책 패키지
두 번째 과제는 해외투자 확대에 따라 발생할 국내 산업의 자본공급 공백을 보완하는 일이다.
3,500억 달러 중 2,000억 달러가 현금 형태로 투입될 경우, 국내 자금의 이탈이 산업 전반의 투자여력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산업별 맞춤형 ‘투자대체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반도체, 배터리, 로봇, 인공지능 등 전략기술 분야에는 민관합동 혁신투자펀드를 신속히 조성해 국내 연구개발 기반을 강화하고, 중소·중견기업에는 ‘대체투자 인센티브 제도’를 신설하여 해외투자 기업의 납품망 공백을 보완해야 한다.
또한 대기업 중심의 통상협상 이익이 산업 전반으로 파급될 수 있도록 ‘공급망 상생지원기금’을 설치해 중소기업의 기술자립과 수출경쟁력 향상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산업 재투자 전략은 해외투자로 줄어드는 국내 유동성을 보완하는 동시에, 내수시장 안정과 기술자립 역량 강화를 촉진할 것이다. 결국 해외 투자와 국내 경제 간 균형을 유지하는 세밀한 산업정책 패키지가 한·미 협상 효과의 지속성을 결정하게 된다.
Ⅲ. 제도적 뒷받침: 통상 거버넌스의 재구축
이번 합의가 일회성 외교 성과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통상정책 거버넌스의 체계적 개편이 필요하다. 현재의 산업통상자원부 중심 체계만으로는 급변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복합적인 무역규범 협상에 대응하기 어렵다.
이에 대통령 직속 국무총리 주재의 ‘통상전략위원회’를 상시 설치해 외교, 산업, 금융 부문이 연계된 통합 조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한·미 통상협력실무위원회’를 신설해 협정 이행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사전 조정하고, 협상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 국민적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국회 또한 통상협상 관련 양해각서(MOU)와 주요 협정의 검토 및 비준 절차를 제도화함으로써 협상 결과의 정당성과 지속성을 보장해야 한다.
나아가 미래 통상환경을 선도할 핵심 분야인 ‘지속가능무역’, ‘인공지능 통상기준’, ‘공급망 안보’ 등 신(新)통상 이슈에 대한 법적·제도적 연구도 강화해야 한다.
이제 통상정책은 단순히 관세율을 조정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되었다.
Ⅳ. 안보 통상 연계전략의 정교화
이번 정상회담에서 언급된 핵추진잠수함 연료 지원 논의는 경제협상이 안보동맹 강화와 깊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시대에, 통상외교의 전략적 정합성을 강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되, 핵추진연료 기술의 국산화와 안전관리 체계를 병행 구축해야 한다.
또한 에너지 안보와 첨단 방산산업을 융합한 ‘원자력·잠수함 복합기술 클러스터’를 조성함으로써 산업역량을 선진화하고, 사이버 안보 및 데이터 보안 협력을 포함한 ‘디지털 안보동맹’을 추진해 통상 협력의 폭을 보다 넓혀야 한다.
이러한 안보통상 연계전략은 단기적인 외교 이벤트를 넘어, 한국이 첨단 전략산업과 국방기술 주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실질적 계기가 될 것이다.
Ⅴ. 국민경제로 이어지는 후속정책
관세협상의 성과는 국민이 체감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정부는 이번 합의가 가져올 경제적 효과를 일자리, 투자, 소득의 선순환 구조로 연결시켜야 한다.
자동차, 반도체, 철강 등 주요 수혜 산업에는 세제 감면과 투자 촉진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중소 수출기업에는 물류비·통관비용 절감 지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또한 지방정부와 협력하여 지역 단위의 수출거점을 육성하고, 산업별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국비로 확대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수출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
이와 같은 후속정책이 체계적으로 시행된다면, 한·미 협상의 성과는 기업의 경쟁력 제고와 국민경제 활성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맺음말
이번 한·미 관세협상 타결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한국의 통상외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중대 계기다.
한국이 통상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협상력 위에 정책 실행력을 더해야 한다.
외환안정, 산업재투자, 제도개편, 안보연계의 네 축이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국익 중심의 지속가능한 통상정책이 완성될 것이다.
경제협상의 성패는 협상장이 아니라 정책이 실현되는 현장에서 결정된다.
이제 정부와 국회, 그리고 산업계가 함께 책임 있는 후속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의 통상외교가 위기 대응의 차원을 넘어, 장기적 국익을 설계하는 전략적 통상정책으로 진화하기를 기대한다.
박동명
▷법학박사, (주)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전)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 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