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죽음, 노동과 권리 사이에서 — ‘법’이 인간에게 말하는 것
법은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다.
그러나 그 언어는 종종 차갑고, 때로는 인간의 얼굴을 잃는다.
노동 현장에서, 거리의 약자 속에서, 온라인의 창작 세계에서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그 정의는 언제나 균등하지 않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은 종종 효율과 통제를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법이 진정 인간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그 본질이 제도나 규범이 아니라 ‘윤리적 연대’의 체계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AI 시대의 저작권은 철저히 ‘인간의 창의’를 중심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기계가 만들어내는 창작물이 넘쳐나는 지금,
‘창작의 권리’는 단순한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표현의 문제다.
하이데거는 “예술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라 했다.
따라서 창작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하지만 현대의 저작권 체계는 종종 거대 기업과 자본에 의해 왜곡된다.
콘텐츠의 소유는 플랫폼이 가져가고, 창작자의 노동은 데이터로 환원된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법이 인간의 창의성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인간의 ‘표현의 자유’를 잃은 것이다.
저작권은 재산권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존엄을 보장하는 법적 언어여야 한다.
노동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형식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의 자기실현’으로 보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인간을 소모하는 기제로 전락했다.
오늘날의 법은 노동을 ‘계약’으로 정의하지만,
그 계약은 종종 불평등의 출발점이 된다.
특히 플랫폼 노동자, 비정규직, 돌봄 노동자 등은
법의 테두리 밖에서 존재하며, 그들의 노동은 사회의 기반을 지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중받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활동이지만, 행위는 인간의 자유를 드러낸다”고 했다.
노동의 법이 단지 근로시간이나 임금의 문제로 한정된다면
그 법은 인간을 ‘생존자’로만 규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노동법은 인간이 자유롭고 존엄하게 일할 수 있는 존재의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
법의 인간화는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가 아니라, ‘약자와 함께하는 정의’를 의미한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회란
가장 불리한 위치의 사람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구조를 설계한 사회다.
그러나 현실의 법은 약자를 ‘대상화’한다.
복지법은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낙인을 찍는다.
노동법은 권리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계급을 고착화한다.
이것이 바로 법의 비인간화다.
법이 인간화되려면,
그 언어가 규율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함께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라 했다.
즉, 법은 인간 사이의 ‘공동 행위’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법은 약자를 위해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존엄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실현된다.
따라서 법은 약자의 권리를 ‘시혜’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법의 인간화이자,
사회적 책임의 재정의다 —
법은 약자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통제가 아니라 연대다.
칸트가 말한 도덕법칙은 개인의 이성에서 출발하지만,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그 이성을 ‘공동체의 약속’으로 확장한다.
법은 명문화된 조항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신뢰의 구조”여야 한다.
공동체가 약자를 포용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사회에서는
법이 따뜻하게 작동한다.
존 롤스의 말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첫 번째 덕목이다.”
그 정의는 더 이상 법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책임지는 행위 속에 있다.
법이 인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법을 완성시켜야 한다.
법이 제도와 절차를 넘어
인간의 존엄과 연대의 철학으로 작동할 때,
그 사회는 진정으로 정의로워진다.
칸트의 인간존엄, 마르크스의 노동 해석,
롤스의 정의론, 아렌트의 공동체 철학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법은 인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법이 인간의 언어를 회복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약자와 함께 걷는 정의의 길 위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