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2-6)
무너진 세계와 근원적 질문
인간의 삶은 견고하게 구축된 성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측 불가능한 폭풍 앞에 위태롭게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성실, 정의, 인과응보라는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그 안에서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삶은 종종 그 모든 논리를 비웃듯 거대한 균열을 일으킨다. 성실하게 살아온 한 가장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으면서 평생의 헌신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 사랑하는 자녀가 희귀병 진단을 받는 의학적 논리를 초월하는 절망적 진단, 혹은, 너무도 선하게 살아 온 이의 급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하필 나인가?"
욥은 바로 이 실존적 질문을 온몸으로 던진 우리의 원형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으며, 그의 삶은 흠결 없는 신앙의 증거였다. 그랬기에 그가 겪은 재앙—자녀, 재산, 건강의 완전한 박탈—은 그가 붙들고 있던 '정의로운 세계관' 자체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욥의 위대함은 고난을 묵묵히 참아낸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무죄와 하나님의 공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신을 향해 집요하게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는 데 있다. 그는 신을 법정에 세우고자 했다.
바로, 이 부분에서도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Allah)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드러난다.
이슬람에서 고난은 인간이 감히 질문할 수 없는 절대적 주권자 알라의 불가해한 뜻이며, 인간의 도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것(이슬람)이다. ‘인샬라’(신의 뜻이라면)라는 말처럼, 주권은 인간과 단절된 채 군림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변증하기 위해 폭풍 속에서 인간에게 ‘말을 거시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고통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신다. 그분은 멀리서 명령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관계 맺으시는 주권자이다.
'왜'를 넘어선 하나님의 응답
욥기의 가장 충격적인 전환은, 하나님이 욥의 절규 어린 '왜'라는 질문에 단 하나의 직접적인 답변도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욥의 친구들은 '권선징악'이라는 단순한 교리로 욥을 정죄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논리 역시 부정하신다.
대신, 하나님은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욥의 고통에 대한 원인 분석이 아니라, 광대 무변한 창조 세계의 신비에 대한 파노라마다. 하나님은 눈의 창고가 어디 있는지, 산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베헤못과 리워야단(하나님이 창조하신 강력한 짐승)의 압도적인 힘을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지 물으신다.
이는 단순한 힘의 과시나 논점 이탈이 아니다. 이는 욥이 붙들고 있던 인간 중심적 '이해의 틀'을 산산조각 내는 충격 요법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세상을 운영하는 내 광대한 지혜와 통치의 극히 일부라도 헤아릴 수 있느냐?"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재단하려 했던 시도 자체가 얼마나 협소하고 교만한 것이었는지를 폭로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지점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을 무시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멀리서 군림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고통의 폭풍 한복판으로 '내려와' 피조물인 인간에게 친히 '말을 거시는' 인격적인 분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대화를 시도하시는 신, 이것이 욥이 만난 하나님이다.
항복인가, 경이인가: 주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 거대한 창조의 신비 앞에서 욥의 기존 세계관은 완전히 해체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위대한 고백이 터져 나온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2절)".
이것은 공포에 질린 자의 굴복이나 패배 선언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작은 이해관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비로소 '목격한' 자의 경이로운 탄성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여전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그 고통조차도 자신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더 큰 계획과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즉시 자신의 지난 투쟁이 어떠했는지를 깨닫는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3절)".
욥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떠들었다고 자백한다. 그의 의로움, 그의 논리, 그의 항변은 모두 하나님의 거대한 통치 앞에서 무지한 독백에 불과했다.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욥의 고백 중 백미는 5절에 이른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는 모든 신앙 여정의 핵심을 관통하는 통찰이다. '귀로 듣는 신앙'은 2차적이고 간접적인 신앙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 교리적 지식, 성경 공부, 타인의 간증에 의존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삶이 평탄할 때는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하지만, 인생의 근간을 뒤흔드는 고난, 즉 '욥의 폭풍'이 닥치면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진다. 교리는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고, 지식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욥 역시 이전까지는 귀로 듣는 신앙의 최고봉에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율법을 지켰고, 정결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about God)' 지식이었지, '하나님 그 자체(God Himself)'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반면, '눈으로 보는 신앙'은 실존적 신앙이다.
이는 고난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나의 모든 지식, 경험, 가치관,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확신까지 모두 녹아내린 후에야 비로소 만나는 하나님 체험이다. 한평생 암을 연구하며 수많은 논문을 쓴 의사가, 자신이 직접 암 환자가 되어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통과할 때 비로소 생명의 본질을 온몸으로 깨닫는 것과 같다. 이론이 실제가 되는 순간이다.
욥은 모든 것을 잃은 폐허 위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가장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이것이 핵심이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고난의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한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다.
티끌과 재: 새로운 시작의 자리
이 실존적 만남의 귀결은 6절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여기서 '회개(repent)'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 잘못이나 특정 죄악에 대한 뉘우침이 아니다. 욥은 여전히 자신이 의롭다는 확신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서의 회개는 '전환'(metanoia)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의와 지혜로 서려 했던 자기중심적 세계관 전체를 '철회'하고 '거두어들이는' 행위이다.
'티끌과 재'는 그의 실존적 무력함과 피조물로서의 본래 자리를 상징한다. 가장 낮은 자리, 모든 것을 잃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찼던 내면을 비워내고, 그 자리를 광대하신 하나님으로 채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대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렸다.
우리 시대의 욥을 향한 질문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크고 작은 '욥의 폭풍'을 만난다. 질병, 관계의 파탄, 경제적 붕괴, 혹은 존재의 허무함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묻는다. "왜입니까?"
욥의 여정은 우리에게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대신, 고난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여전히 고난을 문제 삼아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우고 '왜'라는 답을 받아내려는 무지한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의 폭풍우 속에서 나를 새롭게 빚으시고 만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려 '눈으로' 주를 뵐 것인가?
욥의 고백은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여전히 개념과 지식 속에 머무르며 귀로만 하나님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삶을 무너뜨린 바로 그 고통의 티끌 위에서, 비로소, 눈을 뜨고 하나님을 뵙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