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는 누구나 '처음'의 기억이 있다.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듯한, 메마른 사막에서 생명수를 만난 듯한 그 첫 경험 말이다. 그 존재를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의 벅찬 감격,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충만함. 우리는 그 뜨거움을 '첫사랑'이라 부른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은 가장 뜨거웠던 불꽃마저 식히는 힘을 가졌다. 맹렬히 타오르던 장작은 어느새 온기 없는 재로 변하고, 우리는 그 미지근한 잿더미 앞에서 서성인다. "그때는 그랬지"라며 아련히 추억하지만, 지금 내 심장은 왜 이토록 차가운가.
처음 믿었던 그 신앙의 열정은 왜 시간과 함께 퇴색되는가?
이것은 단순히 '게을러서'라는 한마디로 폄하할 수 없는, 한 영혼의 복잡하고도 아픈 질문이다. 그 진짜 이유를, 우리 마음 깊은 곳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고백하려 한다.
첫째, 우리는 '익숙함'이라는 안개 속에 길을 잃는다.
인간의 마음은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처럼, 아무리 큰 기쁨이나 충격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배경이 되어버린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새벽을 깨우는 기도 소리, 함께 부르는 찬양의 멜로디, 한 구절 한 구절 가슴을 찌르던 말씀. 그 모든 것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상'이 되는 순간, 경이로움은 무뎌지기 시작한다.
매주 반복되는 예배는 감격의 현장이 아니라 지켜야 할 '스케줄'이 된다. 눈물로 고백하던 기도는 내 욕망을 나열하는 '주문'으로 변질된다. 이것은 의식적인 배신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성실하게 그 자리를 지켰기에, 그 성실함이 빚어낸 무서운 습관이다.
A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다. 처음 교회를 나왔을 때, 그는 작은 위로의 말에도 세상을 다 얻은 듯 울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 가장 무표정한 얼굴로 설교를 '점검'한다. 뜨거웠던 심장은 차가운 '판단'으로 굳었다. 우리는 그렇게, 거룩한 신비를 향한 감각을 잃어버린 채 그저 '종교인'이라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둘째, '세상'이라는 더 크고 시끄러운 소리에 우리의 영혼이 잠식당한다.
처음 믿었을 때, 우리의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발을 딛고 선 이 '세상'을 떠나 살 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관은 교묘하고도 집요하게 우리의 틈을 파고든다.
"남들만큼은 살아야지", "이 정도는 이뤄야 인정받지"라는 속삭임. 물질적 성공, 사회적 지위, 타인의 인정이라는 욕망은 '자기실현'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다.
B가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밤낮없이 일에 매달렸던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 치열함 속에서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찾던 시간을 '더 중요한' 일들에 내어주었다.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취해, 생명의 근원이었던 뿌리에서 멀어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를 더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의 매력은 너무나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보상을 준다. 반면, 신앙의 보상은 더디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인지부조화' 속에서 더 크고, 더 확실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도록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그렇게 우리의 영적 초점은 서서히 흐려지고, 결국 하나님은 '최우선'이 아닌 '최후의 보루'로 밀려나게 된다.
셋째, 우리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쌓인 실망의 무게에 짓눌린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종종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은밀한 기대를 품게 한다. 이 전능한 존재가 이제 내 편이니, 내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라는 환상. 그러나 삶은 여전히 혹독하다.
오히려 신앙 때문에 더 큰 시련을 겪기도 한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병세는 악화된다. C는 낫기를 위해 매달렸지만, 돌아온 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이 실망은 단순한 낙담이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근간을 흔드는 '영적 외상(Spiritual Trauma)'이다. 내가 믿었던 '선하심'과 내가 겪는 '현실' 사이의 거대한 괴리.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하고, 더 나아가 분노한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고통의 순간에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문제 해결사'로만 여겼던 미숙한 신앙은, 이 지점에서 좌초한다. 실망이 반복되면 냉소주의가 싹트고, 결국 "믿어봤자 소용없다"는 체념으로 교회를, 그리고 신앙을 등지게 된다.
넷째, 우리는 '본질'을 잃어버린 '형식'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신앙의 '행위' 자체에서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 예배 출석, 헌금, 봉사, 기도 시간. 이 '종교적 의무'들은 원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디딤돌을 쌓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D는 누구보다 성실한 신자였다. 매주 헌신적으로 봉사했고, 헌금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영적으로 풍성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하나님과 단둘이 깊은 교제를 나누는 '쉼'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일했지만, 하나님 '과' 함께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영적 나르시시즘의 함정이다. 자신의 '열심'과 '의로움'에 도취되어, 정작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습관적이고 의무적인 신앙생활은 우리의 영혼을 화석처럼 굳게 만든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
다섯째, 그리고 어쩌면 가장 아픈 이유일지 모르는, '공동체' 안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의 여정을 혼자 걸을 수 없다. 그래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받았다. 서로의 짐을 지고, 함께 울고 웃으며 천국을 향해 가는 동역자들. 그러나 이 거룩한 공동체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연약한 인간들'의 집합소다.
E는 교회 봉사 중에 생긴 사소한 오해와 그로 인한 험담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세상보다 더하다'고 느꼈다. 사랑을 기대했던 곳에서 받은 상처는 다른 어떤 상처보다 깊고 쓰라리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공동체에서 겪은 실망은 종종 하나님에 대한 신뢰 자체를 무너뜨린다. 인간적인 갈등, 위선적인 모습, 닫힌 마음들은 "저런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끈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그 상처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만들고, 결국 영적인 고립을 자초하게 한다.
이 다섯 가지 이유는 결국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시선이 '그분'을 떠나 '나'를 향하고, '세상'을 향하고, '사람'을 향하고, '행위'를 향할 때, 신앙의 열정은 식어간다는 것이다.
신앙이 퇴색되지 않으려면, 이 이유들을 아프게 직시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지금 익숙함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내 마음의 가장 큰 비중을 세상이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관계 없는 형식에만 매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하나님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뜨거웠던 첫 감격의 '느낌'을 재현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본질'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 남은 작은 불씨를 다시 살피고, 그분을 향한 진실한 고백으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신앙의 열정은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