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에 쓴 글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이 여수라는 주장의 문제점'에서 임진왜란 시기 한산도가 ‘영(營)’ 또는 ‘통영(統營)’으로 불렸음을 보여주는 사료를 여러 가지 소개하였다. 이들 사료는 한산도에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라는 혼란한 전쟁 시기에 한산도가 통제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을까? 『난중일기』의 기록을 위주로 이를 살펴보자.
(1) 『난중일기』에 기록된 ‘좌기(坐起)’와 '부좌(不坐)'
충무공은 『난중일기』에서 '업무를 보다'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 ‘出坐’, ‘坐’, ‘坐起’, '公事' 등으로 표현하였고, '업무를 보지 않았다'라는 의미는 주로 '不坐'로 표현하였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충무공은 통제사로서 한산도에 머물던 시기에도 '업무를 보았다' 또는 '업무를 보지 않았다'라는 기록을 수십 차례 남겼다.
조선시대에 '업무를 보다'라는 의미는 보통 ‘좌기(坐起)’로 표현하고, '업무를 보지 않다'라는 의미는 '부좌(不坐)'로 표현하였다. ‘坐起’와 '不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과 같은 조선시대 사서(史書)와 법전(法典) 등에서 사용되던 공식 용어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서 용어 ‘坐起’를 검색하면, 수많은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坐起’의 절차라든가 ‘坐起’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의한 의궤(儀軌) 등의 사료가 상당수 현전한다. 충무공 또한 ‘坐起’나 '不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본인이 업무를 보거나 그렇지 않았던(또는 못했던) 것을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다.
‘坐起’와 '不坐'의 정확한 의미는 관련 연구 논문의 설명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음은 그러한 연구 논문에 설명된 ‘坐起’의 의미이다.
「16세기 강화부사(江華府使)의 좌기(坐起)와 부좌(不坐)」(이성임, 『인천학연구』 4, 2005)
坐起는 일반적으로 ‘관의 장관이 仕進하여 일을 처결하는 것’을 말한다. 즉 경외관(京外官) 구별 없이 관의 장이 업무를 개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 仕進(사진): 관리가 정해진 시간에 근무지로 출근하는 일
‘坐起’의 의미를 간략히 말하자면 ‘수령이 자신의 관청 근무지에 나아가 공무를 처결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不坐'는 ‘수령이 업무를 쉬는 것’을 말한다. 논문 「16세기 강화부사의 좌기와 부좌」에 따르면, '不坐'의 이유는 왕실과 종묘의 국기일(나라의 제삿날), 조상의 기일(제삿날), 휴가, 병가 등으로서 상당히 다양하다. 또한 이 논문은 ‘조선시대 수령의 업무 체계는 坐起와 不坐라는 일정한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었다’라고 설명하였다.
다음은 충무공이 한산도에 머물던 시기 '업무를 보았다(出坐, 坐起, 公事)' 또는 '업무를 보지 않았다(不坐)'라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몇 차례 나타나는지를 정리한 것이다.
1. 1593년 5월 9일 ~ 9월 15일
업무를 본 기록 : 없음
업무를 안 본 기록 : 없음
2. 1594년 1월 19일 ~ 11월 28일
업무를 본 기록 : 4차례
업무를 안 본 기록 : 5차례
3.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
업무를 본 기록 : 40여 차례
업무를 안 본 기록 : 10차례
4. 1596년 1월 4일 ~ 윤8월 10일
업무를 본 기록 : 50여 차례
업무를 안 본 기록 : 11차례
위 내용을 살펴보면, 충무공은 한산도에 머물던 시기에 쓴 『난중일기』에 1594년부터 '업무를 보았다(出坐, 坐, 坐起, 公事)' 또는 '업무를 보지 않았다(不坐)'라는 기록을 남겼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군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휘하 전라우수군은 1593년 5일 9일 한산도 부근 걸망포(통영시 산양면 신전리 신봉마을)에 도착한 뒤 경상우수군과 함께 한산도를 중심으로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얼마 뒤 조선 조정은 충무공을 1593년 9월 12일자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하였는데(「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일자 검토」, 이수경, 『이순신연구논총』 32, 2020), 그 이후 한산도에 집결한 3도 수군은 통제사가 지휘하는 통제영 체제로 바뀌었다. 충무공이 통제사 임명 교지를 받은 날짜는 아무리 빨라도 9월 중순이나 그 이후로 생각된다.
충무공이 통제사로 임명된 이후인 1594~1596년 『난중일기』에는 ‘업무를 보았다(出坐, 坐起, 公事)’ 또는 '업무를 보지 않았다(不坐)'라는 기록이 총 120여 차례나 나타난다. 이는 한산도가 통제사의 근무지(관청)인 삼도수군통제영으로서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다음은 그러한 기록들 가운데 몇 가지 사례를 나열한 것이다.
『난중일기』, 1595년 11월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늦게 나가서 업무를 보았다. 사도첨사(김완)가 나갔다. 함평, 진도, 무장의 전선(판옥선)을 내보냈다.
[원문] 曉行望闕禮. 晩 出坐公事. 蛇渡出去. 咸平珍島茂長戰船出送.
『난중일기』, 1596년 2월 10일
늦게 나가서 업무를 보고 태구생에게 벌을 주었다. 저녁에 곳간을 짓는 것을 직접 살펴보았다.
[원문] 晩出坐 决太仇生罪. 夕 親見庫家造處.
『난중일기』, 1596년 7월 1일
인종의 제삿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았다.
[원문] 以仁廟國忌不坐.
위 『난중일기』 1595년 11월 1일 기록에 따르면, 충무공은 업무를 보고 전라우수영 소속 고을인 함평·진도·무장의 전선을 내보냈다. 전선을 내보내는 일도 일종의 군사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충무공은 ‘관청에서 업무를 본 일(出坐公事)’과 서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위 『난중일기』 1596년 2월 10일 기록에 따르면, 충무공은 업무를 보면서 태구생에게 벌을 주고, 이후 창고를 짓는 것을 직접 살펴보았다. 창고를 짓는 것을 살피는 일도 군사 관련 업무이지만, 충무공은 ‘관청에서 업무를 본 일(出坐)’과 서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위 『난중일기』 1596년 7월 1일 내용에 따르면, 충무공은 인종의 제삿날이므로 업무를 보지 않았다. 이는 ‘관청에 나아가 업무를 보지 않았다(不坐)’라는 의미이다.
한산도에 통제영이 설치된 직후인 1594년 『난중일기』에는 한산도에서 업무를 보거나 그렇지 않았다는 기록이 단지 9차례 나타나지만, 1595년과 1596년에는 각각 50여 차례와 60여 차례나 나타난다. 1594년은 통제영 설치가 안정화되는 시기였고, 그 이후인 1595~1596년부터 통제영 업무(出坐, 坐起, 公事)가 보다 원활히 수행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2) 『난중일기』에 기록된 망궐례(望闕禮)
위 『난중일기』 1595년 11월 1일 기록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한산도에서 망궐례를 했다는 사실이다. 망궐례는 '왕에 대한 공경과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정청(正廳) 또는 객사(客舍)에 전패(殿牌)를 차려놓고 예를 올리는 의식'으로서, 삭망일(매월 1일과 15일)과 명절 등에 시행되었다. 삭망일에 행하는 망궐례의 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가례(嘉禮」의 「사신급외관삭망요하의(使臣及外官朔望遙賀儀)」에 정해져 있다.
다음은 망궐례의 명칭과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연구 논문의 내용을 옮겨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객사 행례와 안성망궐례 재현」(조순자, 『한국학연구』 86, 2023)
지방에 파견된 외관들은 원거리에 있어 왕을 배알(拜謁)하지 못하므로,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궐(闕)’자를 나무에 새긴 패(牌)를 객사에 봉안하고 배례를 올렸다. 이를 망궐례라 하는데, 유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신과 외관들이 특정한 때에 “근무지에서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것”,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비들이 “궁궐을 향해 하직 인사를 올리는 예”, 조선의 왕과 문무관원들이 “중국 궁궐을 향해서 드리는 예”가 있다.
위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사신(使臣)이나 외관(外官)이 행하는 망궐례는 객사가 마련되어 있는 곳에서 전패를 봉안하고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국조오례의』는 망궐례를 행하는 장소를 정청으로 서술하였다.
다음은 충무공이 한산도에 머물던 시기 망궐례를 한 일을 기록한 『난중일기』의 날짜를 정리한 것이다.
1. 1593년 5월 9일 ~ 9월 15일
없음
2. 1594년 1월 19일 ~ 11월 28일
3월 1일, 9월 15일, 11월 1일, 11월 11일
3.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
2월 15일, 6월 15일, 8월 15일, 9월 1일
10월 15일, 11월 1일, 12월 1일
4. 1596년 1월 4일 ~ 윤8월 10일
1월 15일, 3월 1일, 3월 15일, 5월 15일
6월 15일, 8월 1일
위 내용을 살펴보면, 충무공은 한산도에 머물던 시기 통제사가 된 이후부터 망궐례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이 통제사가 된 이후 『난중일기』 기록에는 한산도에서 총 17차례 망궐례를 했다는 내용이 발견된다. 이 가운데 16차례는 삭망일(매월 1일, 15일)에 행했고, 1차례(1594년 11월 11일)는 동짓날(명절)에 행했다. 이들 17차례 이외에 1596년 2월 15일 일기에는 비가 많이 내려 망궐례를 중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난중일기』 기록에 따르면, 한산도에서 행한 망궐례는 충청수영의 장수들이 참석하거나(1594년 9월 15일), 전라우수영의 장수들이 참석하기도(1595년 2월 15일) 하였다. 한산도 망궐례는 전라좌수영을 비롯한 3도의 장수들이 참석하는 통제영 행례였던 셈이다.
조선시대 사료를 살펴보면, 망궐례는 선박과 같은 곳에서 임시로 행했던 경우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는 먼 길을 오가는 사신 등에 해당되는 예외적인 사례이다. 한산도에서 3도의 장수들이 모여 주기적으로 망궐례를 행한 점을 고려하면, 한산도 망궐례는 정청이나 객사가 마련된 공식 관청의 행례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충무공은 통제사로 제수된 뒤 한산도에 머물면서 그곳의 수령으로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망궐례도 행하였다. 이는 한산도가 삼도수군통제영으로서 그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사실을 말해준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시대 법령자료
한국고전종합DB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임, 「16세기 江華府使의 坐起와 不坐」, 『인천학연구』 4, 2005,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조순자, 「조선시대 객사 행례와 안성망궐례 재현」, 『한국학연구』 86, 2023,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수경,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일자 검토」, 『이순신연구논총』 32, 2020,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