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떨어지는 은행잎 하나에서

홍영수

늦가을로 접어든 11월 중순이다. 아파트 사잇길 이편저편의 나뭇가지들은 단풍잎들의 초상을 가다듬어 오색의 가을로 풀어놓고 있다. 며칠 전 인천대공원을 갔었다. 근처에 있는 수령 800년이 넘은 장수동의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서. 

 

팔백의 나이를 넘게 살아오면서 온갖 풍상을 겪고도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비운 허심(虛心)의 마음일까, 자신마저 잊은 망아(忘我)의 경지일까. 의문의 순간에도 부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약할 때는 한 잎 두 잎, 거셀 때는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뜨리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든 뭇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근엄한 듯, 자비로운 듯한 품새에서 난 자연에 순응하며 낙하하는 질서의 이파리를 한 잎 두 잎 맘 속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떨어지는 수많은 잎이 각각 혼자인 것을 알았다.

 

숲의 나뭇잎들이 각각 하나,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 저토록 웅장한 거목의 은행잎들은 같은 가지에서 함께 싹을 틔우고 때가 되어 함께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결코 제각각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도 부모와 형제자매, 또한, 자라고 살아오면서 부딪치고 만났던 수많은 만남의 인연들 속에서도 어느 누가 나를 대신해 아파하고 걱정하며 살아줄 수 있을까? 지금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은행잎이나 떨어져 나뒹구는 잎들의 삶은 햇볕과 비바람, 괴롭히는 벌레로부터 밤낮 부대끼면서 각자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기에 한 잎의 은행잎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때론 싸우기도 하고, 함께 웃고 사랑하면서 살아온 저 잎들의 생존의 의미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시 바라보는 풍경, 땅 위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잎들, 저들은 어느 순간 나뭇잎으로 왔다가 지금, 이 순간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가는 것일까? 어쩜, 대지에 묻히고 썩어지는 순간이 잊히는 순간이 아니라, 아프고 흔들린 생명의 몸짓 언어는 아닐까? 또한, 자연에 순응하면서 해와 별과 달처럼 우주라는 질서의 또 다른 언어는 아닐까. 

 

그 무엇에도 구속됨이 없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우고 버리면서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사라지는 은행잎, 세속의 욕망으로 가득 찬 지금의 내 모습을 뒤돌아보며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떨어져 내리는 이파리의 언어에서 내려놓음의 평온함을 다문다문 주어보았다.

 

난 팔백 년 거목의 은행나무 앞에서 하나의 상상력과 사유의 열매를 따내고, 비록 가을이라는 계절에 떨어져 소멸할지언정 잠시 머물렀던 지상의 천둥소리와 섬광, 한줄기 눈비를 머금었던 그의 몸에서 소멸이 아닌 생성되고 있는 은유 한 잎 손안에 쥐어보았다. 그리고 자연의 결에 따른 운율에 스스로 지금의 형상을 갖추고, 노란 감정과 사유로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며 한 생을 살다 저물어 가는 이파리는 지상에서의 삶이 도피가 아닌 또다시 생성하는 불멸의 흔적이라는 점 하나를 찍은 것이리라 믿었다.

 

자연의 계절은 시간을 다투지 않는다. 낮의 일출과 일몰, 밤의 별자리와 은하수의 흐름을 잘 익혀 적응해 간다. 그러나 은행나무 앞에 서 있는 난 식물이나 들녘의 벌레처럼 계절의 순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분초 다툼을 하며 경쟁하는 삶에서 말이다.

 

눈앞의 은행나무는 푸르렀던 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지만, 다시 또 봄이면 싹을 틔운 사계의 순환을 맞이한다. 그 앞에 선 지금의 나는 한 잎의 나뭇잎이 지는 것을 보고 천하의 가을을 알아내는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러할 수 있을까? 의문 부호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돌아서는 순간 머리 위로 노란 은행잎 하나 툭 떨어졌다. 화두처럼…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5.11.17 11:29 수정 2025.11.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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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