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수태극(水太極) 강줄기가 선명한 구미 도리사

여계봉 선임기자

가을의 끝자락에 구미 도리사의 팔작지붕 일주문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산사 초입까지는 느티나무 가로수길이 이어지는데, 약 2km 길 양쪽에 490여 그루의 잎사귀를 떨군 느티나무가 일렬로 서서 절집을 찾는 이들에게 속세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하심(下心)의 마음으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일주문에서 도리사까지는 4.5km를 더 가야하는데, 일주문이 절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절은 국내에서 구미 도리사가 유일하다. 

 

사하촌인 송곡마을에서 거친 고개를 돌고 돌아 냉산(冷山) 7부 능선에 올라서니 도리사 암자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산기슭의 암자에는 부처의 미소가 번지는 것만 같다. 숲으로는 투명한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햇살 멱을 감는 나무들의 몸내가 상큼하다. 고요한 침묵 속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절은 한 권의 시집이다. 그래서 절에는 시가 있다. 시(詩)란 말씀 언(言)자와 절 사(寺)자가 결합된 단어다. 절에서 수행하는 구도자의 탈속한 언어는 바로 시가 된다. 그래서 산사 가는 길은 한 편의 시 같은 서정(抒情) 넘치는 길이다. 

 

 마치 한 권의 시집(詩集) 같은 구미 도리사

 

스님은 참선에 들었는가. 텅 빈 듯 고요한 산사의 하오가 미묘하다. 냉산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암자의 기운이 싱싱하고 다사롭다. 서슬 퍼런 한풍(寒風)도 이곳에서는 순해진다. 절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집이 산에 있음은 얼마나 적실한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절이다. 

 

늦가을 찬 바람 속에서도 암자의 뜰에 하오의 햇살이 나뒹군다. 미륵전 앞마당에 우뚝하니 서 있으니 도리사의 문화관광 해설사인 주성영씨가 다가온다. 이 지역 출신인 해설사께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사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시작하니 싸늘했던 산사에 온기가 베인다. 구미 태조산의 도리사는 고구려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로 세운 사찰이자, 우리나라 8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데, 사찰 뒤의 냉산은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이 산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왕건이 승리하여 그 이후로 태조 왕건의 묘호를 따서 태조산(太祖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기척 없이 불어온 미풍이 슬쩍 극락전 풍경을 건드려 쨍그랑하는 소리를 낸다. 구미 도리사 극락전은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이며,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인데, 1645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조선 고종 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도리사 극락전

 

극락전 앞뜰에 있는 구미 도리사 화엄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동일한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탑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 높이가 3.3m로 5개 층을 이루고 있으며, 맨 아래층은 탑을 바치는 기단으로, 기단 위의 2개 층은 중심 부분인 탑신부로 여겨지는데, 탑신부의 1층과 2층은 작은 정사각형의 돌을 깎아 2~3단으로 쌓았으며, 맨 위에는 연꽃 모양의 보주로 마무리하였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유형의 화엄석탑 

 

미륵전 옆에 있는 태조선원(太祖禪院)은 영남 제일의 선원으로 알려진 곳으로, 근래의 선지식인 전강 영신 큰스님을 비롯하여 성철 큰스님이 이곳에서 정진하였다고 한다. 한때 1,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참선하신 선원은 'ㄷ'자형 건물로 큰 방 1개, 작은 방 9개가 있으며, 큰 방에는 1931년 조성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태조선원 편액은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인 오세창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영남 제일의 선원이었던 태조선원

 

도리사 세존사리탑은 극락전 뒤 태조선원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높이 1.3m의 석탑으로 석종형 부도를 닮았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보주 아래에 앙련을 새기고, 그 위로 다섯 개의 원을 마련하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라는 글자를 한 자씩 새겨 넣었다. 1977년 이 사리탑에서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육각사리함과 그 내부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으며, 발견된 사리는 적멸보궁 뒤편 새로 건립된 세존사리탑에 옮겨져 안치되었고, 국보로 지정된 금동육각사리함은 김천 직지사에 보관 중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던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적멸보궁은 도리사 경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불상을 별도로 모시지 않고, 법당 뒷편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가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는 대형 통창을 만들어 놓고 예경한다. 적멸보궁 뒤에 있는 석가세존사리탑은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에 조성하였는데, 높이 8m로 팔각원당형부도를 본따서 정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의 탑신을 세웠다.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의 귀꽃에는 여래상을 조각하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적멸보궁 뒤에 있는 석가세존사리탑

 

못을 쓰지 않고 한 가닥씩 짜서 만든 꽃살문에 새겨진 공화(供花)는 비바람에 마모돼 어렴풋한 채색만 남긴 채 애틋한 결을 드러내는 목 조각 위로 햇살이 두근거리며 내린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꽃살문의 저 매력적인 선들을 바라보니 아침처럼 마음 기슭이 밝아진다. 꽃 문살에 새겨진 공화(供華)가 꽃처럼 너울너울 흩어져 절집 마당에 떨어지고, 법당 지붕에 앉고, 소나무에도 쌓이는 듯하다.

 

적멸보궁 문창살에 새겨진 공화

 

적멸보궁 앞 계단에 앉아 건너편 능선을 바라본다. 인색한 햇살 너머로 구미 금오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고 경내의 소나무는 모두 굵고 길게 자라 낙락장송(落落長松)이다. 그래선지 사하촌 마을 이름도 소나무골 송곡(松谷)이다. 전망 좋은 곳에서 한참 앉아 있다 보니 눌린 생각들, 잠겨진 꿈들이 슬금슬금 풀린다. 한 올 바람처럼 머리가 가벼워진다. 적멸(寂滅)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그렇다면 여기서 적멸이 멀지 않은 것인가. 

 

적멸보궁 계단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듯하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밝으면 세상이 밝다. 지극한 정교함과 절묘한 여백의 미가 완연한 소나무들이 어엿하게 절집을 수호하고 있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전각들은 마음을 비운 듯 허허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속에서 절집은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내공으로 무심한 세월을 견딘다. 저마다 견뎌온 세월의 겹이 두터우니 그 안에 담긴 사연은 또 얼마나 흥건하랴. 

 

적멸보궁을 뒤로 하고 도리사에서 전망이 제일 뛰어난 서대(西臺)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리저리 굽은 노송이 중첩된 산길을 걷다 보면 가슴에 솔내음이 켜켜이 잰다. 콧속으로 청량한 향기가 스미고, 풀 돋은 땅을 디딘 발바닥은 폭신폭신 사뿐사뿐 절로 춤을 춘다. 편안한 데크 길을 따라가니 서대가 나온다. 아도화상이 서대에서 서쪽의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곳에 훌륭한 터가 있는데, 그곳에 절을 지으면 불교가 흥할 것이다."라고 하여 그곳에 절을 짓고, 아도화상이 "바로 가리켰다" 해서 "직지(直指)"라 했다는 내용의 부조 조형물이 있다.

 

해설사님께서 서대 위에 있는 더 전망 좋은 장소로 안내한다. 사방이 온통 열린 이곳에 서니 뒤에는 냉산이 우두커니 서 있고, 정면으로는 수태극(水太極)을 그리는 긴 낙동강 강줄기가 선명하다. 바다같이 드넓은 해평(海平) 너머로 동남방 오른쪽으로 대구 팔공산, 칠곡 유학산, 바로 앞에 구미 금오산, 그 너머 희부연 가야산 덕유산, 김천 황악산, 영동의 민주지산의 산 주름이 선명하다. 망원렌즈처럼 눈을 당겨보니 속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흐릿한 먹빛으로 그려진다. 

 

 팔공산, 금오산, 가야산,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유려하다.

 

햇살이 잠시 산사에 들이치니 맞은편 봉우리들은 산그림자로 그윽하다. 절 골짜기는 푸른 연기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나 마치 저물녘의 연못 같다. 해설사님이 끓여주신 커피로 온기를 회복하고 산사에서 내려와 사하촌으로 돌아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5.12.04 12:24 수정 2025.12.04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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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