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온천이 있는 후쿠오카로 겨울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소년처럼 가슴이 설레어 잠을 설치고 말았다. 인천공항에서 후쿠오카공항까지는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제주도 가는 시간과 별반 차이가 없는 거리다. 오후 2시 50분에 출발하는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탔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셔틀 버스를 타고 지하철 공항역으로 이동했다. 지하철을 타고 하카타역에 내려 클리오 코트 하카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층에 파친코 게임장이 있는 오래된 호텔이다. 중년 부부가 여기 왔다가 이놈의 파친코 때문에 대판 싸우고 다음날 각자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저녁 식사를 하러 다시 지하철을 타고 계절 생선요리인 오메카세 스시 코스요리 전문점 '니카쿠스시(二鶴壽司)'를 찾아 나섰다. 구글 지도로 야쿠인오도리(藥院大通)역 근처의 골목을 뒤져 목적지를 정확히 찾았다.
정말 일본스럽다. 올망졸망한 스시 한 점씩을 순서대로 내놓는다. 한 점 먹고 나면 절인 생강으로 입을 정리하고 다음 요리를 맛본다. 이까(오징어)에 이어 사바(고등어), 다이(도미), 새우, 조개, 장어 등이 순서대로 나왔다. 사케를 시켜 불콰할 때까지 계절의 풍미를 즐겼다.
벽에는 천객만래(千客萬來)라는 글씨와 영업허가증(營業許可證)이 붙어 있는데,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영업허가증이란 말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주인은 대를 이어 이 일을 하는 스시의 달인이다. 어머니로 보이는 늙은 할머니 한 분이 말없이 도와주는 것을 보니 전통과 자부심이 엿보이는 집이다. 코스가 끝날 때쯤 내놓는 미니 요리는 음식이라기보다 예술에 가깝다. "Small is beautiful"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다.

주인은 너무 친절했다. 주문을 받을 때는 꿇어앉아서 받는다. 다 먹고 떠나는 손님은 직접 문밖에 나가서 배웅을 하고 작은 선물까지 하나 주는 것을 보았다. 이런 친절과 프로 정신은 대체 그 뿌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번 여행은 자유여행이지만 2일차 하루는 가이드가 있는 '유유 버스투어'를 했다. 아침 8시에 버스를 타고 하카타 호텔에서 출발하여 오이타현 히타시(大分県日田市)에 있는 마메다(豆田)로 향했다. 에도시대의 부촌이었던 마메다는 300년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영지로 분위기가 교토를 닮았다. 높은 산속에 숨어있는 고산 성하(城下) 마을이다.

마메다(豆田)에는 에도 시대의 모습을 잘 보존한 옛 전통 거리가 있다. 역사와 전통의 도시답게 목조 상가와 옛 상점, 사케 양조장, 오래된 약방과 잡화점, 토종 간장과 된장 상점, 오래된 가옥을 활용한 카페와 갤러리들이 즐비하다. 마메다는 일본 정부가 지정한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역(重要 伝統的 建造物群 保存地区)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한가 보다. 치킨을 파는 할머니 상점과 바로 옆 할아버지 상점이 견원지간처럼 경쟁을 하고 있다. 나막신을 파는 가게의 영감은 큰 나막신 모형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물건은 사지 않는 관광객들에게 역정을 내기도 한다. 남자 관광객들은 사케 공장을 기웃거리고 여자들은 간장공장에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아열대 지방이라 12월인데도 목화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이방인은 타임머신을 타고 300년 전 이국의 거리를 방황했다.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빵은 아직도 거리에 남아 있는데, 그 시절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고장에 콩이 많이 나서 간장과 된장을 제조했던가 보다. 콩밭 마을 두전(豆田)은 아직도 에도시대의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버스는 벳부(別府市)로 향했다. 오이타 현의 벳부는 일본에서 온천수 용출량이 제일 많은 도시다. 세계에서는 미국의 옐로 스톤 국립공원 다음으로 2위라고 한다. 버스는 드디어 가마도 지옥 온천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는 유황 재배지부터 둘러보았다. 밀폐된 초가집 움막 안에서 유황 연기가 올라오면서 물방울이 떨어져 땅바닥에 유황이 쌓이는데, 마치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곳을 유황 재배지라고 했나 보다. 이것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대를 이은 가업으로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가문의 후손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이 모두 이 일을 하고 있다. 돈도 좋지만 젊은이들에겐 죽을 지경이 아닌지 모르겠다.

가마도 지옥 온천으로 들어서니 한국말을 잘하는 해설사가 온천을 돌면서 모기향 연기를 이용하여 온천의 김이 확 피어오르게 하는 연기쇼를 보여주었다. 온천수로 익힌 달걀을 먹고, 라무네 사이다를 마시면서 족욕을 하니 피로가 확 풀렸다. 이곳 온천수를 마시면 십 년은 젊어진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죽기 싫은 욕심쟁이 늙은이들이 뜨거운 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토산품 가게에서 시음을 하라고 주는 고구마 소주를 염치도 없이 두 잔이나 마셨다. 반술이나 되어 버스를 타고 유후인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차창 너머로 유후다케 화산이 유황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유후인에 내려 맨 처음 간 곳은 긴링코 호수다. 호수라고 해서 백두산 천지처럼 엄청 큰 줄로 알았는데, 막상 보니 동네 저수지 수준이었다. 주변의 작은 하천에는 환경보전이 잘 되어 야생 오리들이 살고 있다. 막바지 단풍이 호수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자, 사람들은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며 연신 인증샷을 찍어댔다.

전국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고로케 가게 앞에는 인파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맛이 좋아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내 체질에 맞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 대신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사서 주는 골목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당근을 사서 양들에게 주는데, 큰 놈이 다 먹어버려서 일부러 새끼 입 앞에 내밀었더니 큰 녀석이 달려들어 통째로 빼앗아 먹어버렸다. 어디로 가나 짐승은 짐승일 뿐이다.
오후 늦게 버스투어를 마친 후, 택시를 타고 유후인 산골짜기에 있는 와잔호(和山豊) 료칸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여관에 해당하는 료칸은 호텔보다 비싼 전통 일본식 숙박시설로 온천수가 콸콸 흘러넘치는 노천탕이 객실마다 딸려 있다.

다다미 방에 짐을 풀어 놓고 낙엽이 흩날리는 노천탕에 뛰어들었다. 아, 이게 얼마 만인가. 쉴 때는 이렇게 쉬어야 한다. 여행을 준비하고 동행한 작은아들 녀석이 고마웠다. 이날 저녁 아들과 술친구가 되어 맛난 가이세키 석식에다 사케와 맥주를 마시며 밤이 이슥할 때까지 놀았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