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설악산 자락을 감싸는 하얀 입김 속에서 나무틀에 매달린 명태들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변해간다.
이곳은 강원도 인제, 우리나라 최대의 황태덕장이 자리한 마을이다.
영하 20도를 오가는 혹한 속에서 바람과 햇살, 그리고 밤낮의 기온 차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건조 기술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한국식 지혜의 결정체다.
명태는 단순한 생선이 아니다.
그 속에는 한국인의 겨울 식탁 문화, 지역 공동체의 생명력, 그리고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설악산 자락의 겨울, 황태덕장이 깨어나는 순간
겨울이 시작되면 강원도의 산골마을은 분주해진다.
11월 말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 명태를 걸어 말리는 황태덕장의 계절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해마다 약 1만 톤 이상의 명태가 이 지역 덕장에서 건조된다.
황태로 거듭나는 명태는 오랜 시간을 거쳐야 완성된다.
영하의 밤에는 얼고, 낮에는 햇살에 녹는 과정을 20~30회 이상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명태의 살은 단단해지고, 비린내는 사라지며, 특유의 고소하고 깊은 감칠맛이 배어난다.
덕장은 단순한 가공공장이 아니다.
이곳은 겨울의 자연이 함께 일하는 거대한 야외 작업장이다.
눈이 쌓이면 눈을 치우고, 바람이 약하면 방향을 바꾸는 덕장의 사람들은 오랜 경험으로 자연을 읽는다.
그들은 자연을 ‘통제’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일한다.
눈과 바람이 만든 황금빛 명태 ‘자연 냉풍 건조’의 비밀
황태가 황태로 불리는 이유는 색깔에 있다.
햇빛에 반사된 명태의 살이 누렇게 변해가며 황금빛을 띤다 하여 ‘황태(黃太)’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자연 냉풍 건조(natural cold-air drying)**이다.
인공 열풍으로 말린 명태와 달리, 자연 건조된 황태는 단백질이 파괴되지 않고, 수분이 고르게 빠져 맛이 깊다.
덕장에서는 풍향과 기온, 습도를 매일 기록한다.
이들은 ‘하늘의 시간표’에 맞춰 일하며, 자연이 주는 그날의 조건에 따라 명태의 상태를 조절한다.
명태 한 마리를 완전히 건조시키기까지 약 60일이 걸린다.
그 과정에서 얻는 맛의 깊이와 질감의 차이는 단순한 공업 생산품으로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도 서울의 유명 한식당과 고급식품 브랜드는 강원도 황태덕장의 제품을 찾는다.
사라져가는 전통, 이어가는 사람들
기후 변화와 어획량 감소로 인해 예전처럼 명태를 대량으로 잡기 어려워졌다.
북태평양의 해수 온도가 상승하면서, 한때 동해를 가득 채웠던 명태는 이제 러시아와 알래스카 근해에서 주로 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제·용대리의 덕장 장인들은 여전히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70대 장인 이모 씨는 말한다.
“기계로 말리면 빠르지만, 자연이 만든 황태 맛은 절대 못 따라가요. 황태는 ‘얼고 녹는 숨결’을 먹는 거예요.”
덕장의 젊은 세대들도 변화의 길을 모색 중이다.
온라인 유통망을 통해 전국에 ‘수제 황태’를 판매하고, 지역 축제를 통해 관광객을 유치한다.
이들은 ‘전통을 산업으로’ 바꾸는 새로운 세대다.
현대식 명태 산업의 변화와 지역경제의 부활
강원도의 명태 산업은 단순한 어업이 아닌, 지역경제 생태계의 핵심 축으로 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AI 기반 건조 시스템과 IoT 센서를 활용해 자동 습도 조절형 덕장이 등장했다.
이 기술은 전통의 맛을 지키면서도 생산 효율을 높인다.
또한, 명태를 활용한 다양한 식품 — 명태포, 황태국, 황태즉석밥, 황태스낵 등 — 이 개발되며
지역 청년 창업의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속초·인제군은 황태를 지역 특산품으로 브랜드화하여 ‘황태 명품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덕장의 연기로 피어오르던 냄새가 이제는 ‘지역경제의 희망’으로 피어나는 셈이다.
명태는 단순한 어류가 아니다.
그 속에는 한국인의 삶, 자연과 인간의 공존, 그리고 세대를 잇는 장인정신이 담겨 있다.
겨울의 혹한을 견디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태처럼,
강원도의 전통은 지금도 차가운 바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있다.
황태덕장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지역문화의 미래를 여는 살아있는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