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명하려는 시는 죽은 시다. 죽은 시를 문예지에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문예지는 죽은 시를 매장하는 공동묘지가 아니다. 2025년 어떤 문예지 2, 3월호에 총 108편(54명) 가운데 5편(5명)에 불필요한 사족을 달았다. 일부 시인이긴 하지만, 시를 설명하려는 습성에 젖어 있다는 증거이다.
평자가 과거 월간 《예술부산》(2012. 3월호) 지면에 어떤 문예지(2011, 11월호)에 실린 “운문 32편 중 3분의 1이 넘는 11편(시 18편 중 6편, 시조 12편 중 3편, 동시 2편 중 2편)이 주석을 달고 있다.”라고 통계를 제시했다. 또한, 그 문예지(2016. 10월호) 월평에서 앞 달에 발표한 시 40편(20명) 가운데 사족에 불과한 주석과 시작 메모 형식의 주석을 단 시가 4편(3명)이나 있음을 통계와 함께 가치 평가한 적 있다.
2025년 그 문예지(2, 3월호)의 통계와 과거의 통계를 비교해 보면, 급격하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시에 난삽한 설명을 가하려는 시인이 줄어든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나는 머물지 못하여 / 머물지 못하여 망설이는 스산한 바람
*밀양 부봉사에는 나비의 전설이 있다
-「무봉사에 나비가 날다」 일부
어둠을 몰아내고 사랑의 강물이 흐르는 길목에서 / 영원을 함께 노래하는 / 나의 술람미*여
*구약성경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
- 「연가」 일부
귀가 운다* / 울어댄다 / 다시 귀가 운다
*브런치스토리에 발표한 규린 종희의 「이명」
― 「이명」 일부
마야 부인*의 옆구리가 뚫리듯 / 겨울의 옆구리가 열리고 / 봄이 얼굴을 슬그머니 내민다
*윤회설을 주장한 싯다르타의 어머니, 싯다르타는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한다.
― 「봄」 일부
은빛 바람개비 / 옥빛 바당*을 기대고 서서 휑휑 돌고 있다
* 바당: 제주 토속어로 바다
― 「성세기 해변 바람개비」 일부
인용 시 다섯 편 모두 시인 스스로 난삽한 설명조 글로 전락시켜 버렸다. 불필요한 사족을 달았다. 시의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시인이 앞장서서 스스로 시의 말미나 본문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특히 ‘바당’은 지식의 오류이기도 하다. 이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 함경도에서도 ‘바다’를 ‘바당’이라고 한다. 그 증거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바다의 방언(경상, 제주, 함경)”이라고 등재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겸임교수
저서 : 평론집 10권, 이론서 3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