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까닭 없는 인연의 허상

민은숙

오랜만에 회식 후 버스를 탔다. 뒷좌석에 이미 앉아 있던 한 중년 남성은 내 옆자리로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 젊은 분들 힘드시죠? 저도 예전엔 직장생활이 참 어려웠어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내 직업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이 운영하는 작은 사업을 이야기했다. 

 

"혹시 부업에 관심 있으시면 연락드려도 될까요? 요즘 같은 시대에 수입원이 하나뿐이면 위험하지 않겠어요?" 

 

명함을 건네며 웃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장자는 《산목》 편에서 "피무고이합자 무고이리(彼無故而合者 無故而離)"라고 했다. 까닭 없이 결합된 것은 까닭 없이 떨어지게 되는 법이라는 뜻이다. 그 순간 이 고전의 지혜가 현대적 직관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깨달았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같은 책을 찾던 친구와의 만남이 그랬다. 특별한 의도나 목적 없이 시작된 대화가 점점 깊어지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우정으로 발전했다. 이런 관계에는 억지스러움이 없다. 서로의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겹치고, 만남이 부담스럽지 않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편안해진다.

 

반면 갑작스럽게 다가와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보험 판매원, 다단계 판매원, 혹은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친절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거래를 위한 투자였던 셈이다.

 

SNS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온라인에서 갑자기 나타나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 처음 만났는데 개인적인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 빠른 시간 내 깊은 관계로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장자의 경고가 떠오른다.

 

작년에 만난 한 지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온라인 모임에서 만난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다. 상대방은 처음부터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비싼 선물을 주고받으며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하지만 몇 달 후 그 사람은 갑자기 큰돈을 빌려달라며 사정했고, 거절하자 연락을 끊어버렸다. "까닭 없이 결합된 것은 까닭 없이 떨어진다"는 장자의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된 셈이었다.

 

장자의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관계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쌓아가는 것이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신뢰, 공통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유대감,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다져지는 우정 - 이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급작스러운 친절에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잠깐 멈춰서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이렇게 친절할까? 우리 사이에 이런 관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나? 혹시 내가 보지 못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장자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냉소적으로 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진정성 있는 관계를 추구하라는 의미다. 새로운 만남에 열린 마음을 갖되,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라는 것이다.

 

얼마 전 동네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와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되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날씨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이런 관계는 부담스럽지도, 의심스럽지도 않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형성된 소중한 인연이다.

 

장자가 전하는 까닭 없는 결합은 까닭 없이 떨어진다는 문장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급속도로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지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급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치 나무가 자라듯이, 계절을 거쳐 가며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조급해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다리며, 진정성 있는 관계를 소중히 키워나가야 한다.

 

까닭 없는 친절에 현혹되지 말자. 대신 작은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인연을 소중히 여기자. 그것이야말로 장자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삶의 지혜가 아닐까.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5.12.31 09:03 수정 2025.12.3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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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