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진실의 시대에 정치는 사실보다 감정을 먼저 겨냥한다. 허위 정보와 음모론, 혐오와 분노를 자극하는 선동은 언제나 감정을 통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팩트를 바로잡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들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이 접속하는 정서의 구조다. 특히 반복되고 의식되며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감정'이 결정적이다. '분노 낚시'라는 표현이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의 정치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감정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청소년은 이 탈진실의 한복판에 서 있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정보 환경 속에서 청소년은 분노와 불안을 증폭시키는 콘텐츠에 일상적으로 노출된다. 극단적인 주장은 '솔직함'이나 '진실 폭로'의 얼굴로 소비되지만 정작 청소년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한다. 감정은 끊임없이 자극되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성찰할 언어는 제공되지 않는다. 이런 조건에서 비평교육이 부재하다면 청소년은 감정 정치의 가장 쉬운 표적이 된다.
현행 교육은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학교는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은 대체로 객관성과 논리성으로만 환원된다. 감정은 비평의 출발점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여겨진다. 질문은 허용되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고 사고의 과정은 평가되지 않는다. 글쓰기 수업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청소년의 글은 늘 '논증이 부족한 미완성'으로 규정된다. 그 결과 청소년은 자신이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 불안을 신뢰하지 않도록 훈련된다. 감정은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억눌러야 할 것으로 남는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맥락화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감정이 조작될 때 속수무책이 된다. 분노 낚시와 정당한 분노를 구별하지 못하고, 감정적 위안을 주는 거짓말과 구조를 드러내는 불편한 진실을 식별하지 못한다. 학교는 '팩트를 확인하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그 팩트에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무능력의 결과는 개인의 일생에 걸쳐 지속된다.
청소년기는 세계관이 형성되는 결정적 시기다. 이 시기에 형성된 감정의 방향과 사고 방식은 오래 지속된다. 그런데 지금 많은 청소년이 경쟁 체제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박탈감을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특정 집단의 문제로 오인하도록 유도되고 있다. '여성 할당제 때문에 내가 불리하다', '이주민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식의 프레임이 청소년의 언어가 되어간다. 혐오는 '솔직한 의견'으로, 능력주의는 '현실 인식'으로 포장된다. 중요한 점은 이 감정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안과 좌절은 실제로 존재한다. 문제는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이 왜곡될 때다. 그렇게 될 경우 분노는 구조가 아니라 약자를 향하게 된다. 이것이 감정 정치의 작동 방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소년 비평교육의 필요성이 드러난다. 비평교육의 핵심은 청소년이 자신의 감정을 신뢰하도록 돕는 동시에, 그 감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이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지우는 교육이 아니라 감정을 자각하고 되새기며 언어화하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그 핵심적인 도구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는 기술이 아닌, 느낀 것을 다시 바라보고 질문하는 행위다.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른 사람들은 같은 상황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묻는 과정 속에서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비평교육은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바뀌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판단에 이르렀는가다. 감정을 출발점으로 삼되 그것을 구조적 질문으로 확장할 수 있을 때 청소년은 감정 정치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 해석자가 된다.
탈진실 시대의 민주주의는 팩트체크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이 각자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이 어떻게 조직되고 조작될 수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을 때만 민주주의는 지속된다. 청소년 비평교육은 바로 이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다. 감정을 배제하는 교육에서 벗어나 감정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인정하는 것, 완결된 주장보다 질문의 과정을 존중하는 것, 정답을 가르치기보다 다양한 관점을 경유하도록 돕는 것, 채점하는 교사가 아니라 함께 읽고 묻는 독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청소년비평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청소년은 자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의 균열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이들이다. 지금 점검되어야 할 것은 글쓰기 기술이 아니라, 청소년을 '아직 충분히 사유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제해온 교육의 태도 자체다. 비평교육은 새로운 능력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는 감각을 신뢰하고 확장하는 일이다. 탈진실의 시대, 이것보다 더 시급한 교육은 없다. 이 교육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모든 교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