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병오년 정초에 만난 설국 한라(漢拏)

여계봉 대기자

병오년(丙午年) 새해 정초,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설국 제주는 곧 한라산이요, 한라산은 곧 제주라는 것을 한눈에 보여준다. 50년 지기인 우리나라 바리스타 1세대를 대표하는 허형만 친구와 함께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한라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1100도로에 들어서니 도로 주위는 그야말로 설화로 핀 나목이 펼치는 설국이다. 겨울의 자연이 베푸는 향연을 즐기다 보니 새벽잠을 설치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까지 온 피로감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영실 탐방지원센터에서 2.5km 떨어진 영실 휴게소까지는 결빙으로 차량 운행이 통제되어 걸어서 오른다. 아침 햇살에 은백색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숲속에는 가지에 매달려 축 처진 굴거리나무의 푸른 잎사귀가 거꾸로 매달린 박쥐처럼 보인다. 40분 정도 걸려서 도착한 영실 휴게소에서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하얀 솜이 살포시 내려앉은 숲속은 은은한 빛 감도는 한 폭의 수묵화다. 이 숲이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입상한 '아름다운 소나무 길'인데, 풍성하게 눈을 머리에 인 소나무 터널을 통과하면서 몸은 사바세계, 마음은 극락세계에 있는 듯하다. 

 

설화로 핀 나목은 한 폭의 수묵화다.

 

숲이 끝나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긴 나무데크가 나타난다. 급경사의 나무테크 오른쪽으로 '신들의 거처'라고 불리는 거대한 영실기암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으로 둘러싸인 영실기암은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영주10경(瀛州十景) 중 으뜸인 영실기암의 병풍바위 아래에 깔린 연무를 헤치니 서귀포 시가지가 아련하게 보인다. 

 

 영주10경(瀛州十景) 중 으뜸인 영실기암

 

고개를 뒤로 돌리면 금오름, 새별오름을 비롯한 제주 서부 지역의 오름이 한눈에 잡힐 만큼 전망이 시원스럽다.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비양도와 차귀도, 수평선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오름들이 해안선까지 완만히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세는 동화 속 궁전을 떠받치는 성채와도 같다. 솜사탕 풀어놓은 듯 산자락을 휘감은 운해는 달팽이 걸음으로 느릿느릿 흘러가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다. 

 

오름 끝으로 보이는 제주 서부 해안

 

긴 데크길이 끝나자 한라산 정상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한겨울에도 초록빛을 띠는 구상나무 주단을 깔고 백록담 남벽이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며 솟아 있다. 원추형의 한라산 그 정점을 다섯 갈래로 분할하는 등산로 영실, 어리목, 돈내코, 관음사, 성판악 코스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일 뿐 아니라 백록담의 신성함을 제주 사람들과 연결하는 질긴 끈이라 할 수 있다. 한라산 곳곳에는 화산 활동으로 생긴 무려 360여 개나 되는 수많은 원추형의 작은 화산들이 ‘오름’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마치 백록담을 호위하듯 솟아 있다. 

 

제주는 곧 한라산이요, 한라산은 곧 제주이다.

 

우리가 지나가는 선작지왓은 한없이 넓은 초원의 광야이다. 봄에는 난쟁이 산죽이 온 산을 뒤덮고 있지만 지금은 백설로 가득하다. 이곳이 바로 선작지왓이다. 선작지왓에서 '선'은 '서 있다', '작지'는 '돌'을 가리키는 말이고, '왓'은 제주 사투리로서 '밭'을 이른다. 봄에는 돌 틈 사이로 피어나는 산철쭉과 털진달래가 붉게 꽃의 바다를 이루고, 여름에는 하얀 뭉게구름과 함께 녹색의 물결을 이루어 산상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여기의 작은 나무들이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설경을 만드는 이 초원은 한라산이 자랑하고 있는 식물들의 보고다. 몇 년 전 이곳 노루샘을 지나면서 만난 노루 두 마리가 생각난다. 노루샘 부근에 서성이던 노루들은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아득한 광야에서 혹독한 자연의 시련을 겪는 노루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금방이라도 우리 눈앞에 나타날 것 같다.

 

선작지왓의 광활한 초원

 

영실에서 출발한 지 2시간 반 걸려 도착한 윗세오름은 혹독한 바람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오늘따라 바람 한 점 없는 햇빛 좋은 윗세오름 대피소의 야외 데크에 앉아 한가로이 점심을 먹는다. 겨울 한라에서는 바람도 풍경이다. 오늘은 바람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어 아쉽게도 풍경 하나를 놓친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순백으로 단장한 만개한 설화의 절경을 보여준다. 순백색 순정함으로 삶을 환기시키는 설산을 오르는 일은 얼마나 큰 길운인가.

 

윗세오름은 오늘따라 순한 양의 모습이다.

 

윗세오름에서 남벽 분기점으로 가는 길은 폭설로 어제까지 통제되었으나 운 좋게도 오늘은 길이 열렸다. 윗세오름에서 방아오름으로 가는 길은 기차 터널처럼 긴 눈 터널이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남벽 분기점으로 가는 급경사의 나무데크가 이어지고 넓디넓은 방아오름 평원 위에 사구처럼 생긴 눈 언덕이 펼쳐진다. 한라산에선 바람이 기묘한 절경을 연출한다. 

 

 바람이 만든 평원 위의 눈 사구

 

한라산 남벽이 밝은 광채를 보이기 시작한다.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까지 줄여가며 황홀하게 그 모습을 바라본다. 마침내 남벽이 그 장엄한 모습으로 서서히 다가오자 소리없는 장중한 음악이 온 설원을 뒤흔든다. 한라산에서 만난 자연은 한마디로 신들의 정원이다. 돈내코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남태평양과 서귀포쪽이 시원스레 조망되고 고개를 돌리면 바로 웅장한 한라산 정상이 올려 보인다. 백록담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귓불을 스치는 바람이 포근하기만 하고 따사로운 햇볕에 하얗게 피어난 설화가 눈을 황홀케 만든다. 설화로 핀 나목의 하얀 그리움. 기력을 다한 눈보라는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헐벗은 산야를 덮어 주고 눈부시도록 하얀 눈꽃을 피운다.

 

돈내코 방향의 서귀포 시내와 남태평양

 

남벽 분기점에 도착하니 통제소 뒤로 거대한 서북벽이 가로막고 있다.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의 힘찬 함성이 바람으로 들끓어 오른다. 분화구 사면의 골짜기엔 서설로 생긴 주름살이 그로테스크한 조각 같다. 왕관을 휘감은 운해가 수평선으로 구름 이랑을 갈아내며 검은 바위와 하얀 눈이 빚은 백록담 수묵화에 자막을 긋는다. 가까이에는 햇빛 담은 하얀 눈꽃이, 멀리에는 구름 아래로 성산 쪽 바다가 지평선 위로 슬며시 올라온다. 날씨가 아주 맑으면 일출봉과 우도까지 조망된다. 햇빛 좋고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날, 한라산을 오르는 행운에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남벽 분기점에서 바라본 백록담 남벽

 

남벽 분기점에서 다시 윗세오름으로 돌아가서 어리목 방향으로 내려선다. 어리목은 '어리+목'의 구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어리'는  '어름'의 변음이고  '목'은 '통로 가운데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뜻하는 고유어이다. 만세동산으로 한발 두발 딛으며 숲길을 가득 메운 조릿대 댓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나목(裸木)의 울림을 느끼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쌓인 눈이 무심히 밝다. 순정한 백설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다. 설맹(雪盲)인가.

 

순정한 백설로 뒤덮인 만세동산 조릿대

 

서제비동산에서 어리목계곡으로 내려서는 제법 경사진 능선 주변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산야가 푸를 때는 오히려 때 묻은 옷을 걸친 것처럼 보이지만 온 산이 시들고 조락(凋落)하는 이 겨울에야 송백(松柏)이 참모습을 드러낸다. 키는 난쟁이지만 또렷한 잎 매무새와 진한 초록은 은세계의 백미다. 주변 나무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그들 군락 앞에 다가가 눈 위에 무릎 꿇고 감상하며 저들이 뿜는 산소를 들여 마시니 내 허파가 요동친다. 다소 거친 숲길은 산행 날머리 어리목 주차장까지 이어진다. 17km의 눈길을 6시간 이상 걸으면서 신이 빚은 설국에서 천상의 설경을 원도 한도 없이 마음껏 구경했건만 내 심장으로 찾아와 그리움으로 핀 설화는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린다.

 

오늘 산행의 날머리 어리목 주차장

 

겨울 산의 매력은 적막과 비움이다. 바람 소리 외는 묵언의 침묵과 잎새를 떨구고 홀로 선 나목의 비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웅변인가. 다소 헐겁고 여백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다. 겨울은 비우는 계절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려야 '비움'에 다가서는 것이다. 한라산에서 만난 '비움'은 나 자신의 건강한 '채움'이 되어 병오년 한 해를 보내리라 다짐해본다.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6.01.08 13:46 수정 2026.01.08 13:4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여계봉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