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모든 깨달음은 후회를 전제합니다.
후회가 없다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개념으로 옮기면 모든 구원은 회개를 전제한다는 말이 되고, 불교의 개념이라면 참회가 이에 해당합니다.
연극학에서는 ‘반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반전이 없으면 감동도 없다는 공식을 깨달아야 합니다. 연극이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면 반전을 반드시 연출해 내야 합니다.
반전이 되었든 구원이 되었든 깨달음이 되었든 공식은 다 똑같습니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런 바람을 응시하게 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됩니다.
꿈이 있다면 그런 꿈을 꾸게 하는 원인을 깨달아주면 됩니다.
성공을 바란다면 패배의 쓴맛이 무엇인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도 알면 됩니다.
구원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생지옥에 빠져보면 됩니다.
고행은 쉽지 않습니다.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 대응하고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쉬운 것을 원합니다. 어려운 것은 싫습니다. 죽어도 살고 싶어합니다. 틀려도 옳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생각하는 존재는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누가 옆에서 자신의 생각에 훈수를 들면 싫어합니다. 그때는 모든 말들이 잔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생각에 갇히면 답이 없습니다. 스스로 독단을 펼치면서도 그 생각이 독단인 줄 모릅니다. 인식이 없으니 자신이 잔인한 생각을 펼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상대를 향해 단정하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일에는 능해도 그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는 그저 요원한 이상이 되어 머무를 뿐입니다. 고행은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쉽지 않은 것, 제대로 할 수 없는 것, 힘든 것 등, 그런 것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전인적인 인격체일 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한계가 있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자신이 어려워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신의 몸이 껍질을 지니듯이, 자신의 생각에도 그것의 한계를 지닙니다.
껍질일 때는 한계에 도달한 인식이 되고, 그것이 껍데기가 되면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껍질일 때는 아파도 견뎌야 하는 지경이지만, 그것이 허물이 되면 벗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껍질일 때는 때를 벗기듯이 조심해서 씻어야 하지만, 그것이 존재를 감싸고 있는 돌멩이 같은 존재라면 니체처럼 망치를 들고 그 돌을 깨야 하는 일이 요구됩니다.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때려 부순다. 돌에서 파편이 흩날리고 있다. 무슨 상관인가?”
《니체, 문학과 철학의 두물머리》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나의 머릿속에는 이런 말이 인식의 그물이 되어 사물을 낚고 있었습니다. 낚이는 것이 나의 생각을 형성해 줬습니다. 걸려드는 것이 나의 정신으로, 나의 이념으로 굳어졌습니다.
돌을 깨고 형상을 꺼내는 작업이나, 그물로 고기를 낚는 작업이나, 심연에서 수면 위로 솟아올라 연꽃으로 피어나는 현상이나, 임마누엘의 이념으로 곁을 내주고 공동공간을 형성해 내는 작업이나 다 같은 공식입니다.
곁은 껍질도 또 껍데기도 됩니다. 곁이 거부감의 원인이 되기도 또 기쁨의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곁이 혐오감의 원인이 되기도 또 행복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살과 살이 맞닿을 때의 느낌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최고의 순간은 행복한 감정으로 충만합니다. 그때의 인식은 삶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의 순간을 알려줄 것입니다. 삶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의 순간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살아서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은 자기 손해일 뿐입니다.
사랑은 자기 책임입니다. 사랑하고 못 하고는 타인에게 묻고 따질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