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8년에 발생한 고사마루(護佐丸)와아마와리(阿麻和利)의난은 류큐왕국 초기 정치구조의 취약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1차쇼씨왕조 제6대국왕 쇼태구왕(尚泰久王) 재위기에 벌어졌으며, 삼산통일 이후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지방세력 안지(按司)의 독자성과 중앙왕권의 불안정한 균형을 여실히 보여준다.
1429년 쇼하시(尚巴志)에의해 삼산이통일되었으나, 통일은 곧바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각 지역의 안지들은 여전히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실질적 지배자였으며, 왕권은 이들을 견제하면서도 의존해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고사마루와 아마와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왕권과 관계를 맺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고사마루는 삼산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노련한 장수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정치적 생존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본래 자키미성(座喜味城)의성주였으나, 왕명에 따라 세력이 급성장하던 아마와리를 견제하기 위해 나카구스쿠성(中城城)으로 이동했다. 이 조치는 고사마루가 단순한 지방호족이 아니라 왕권을 대변하는 군사적 감시자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아마와리는 가쓰렌성(勝連城)을 거점으로 해외교역을 적극 활용해 막대한 부와 병력을 축적한 인물이다. 그는 지역경제를 활성화한 유능한 통치자였으나, 동시에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였다. 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잇는 교역망은 아마와리를 단순한 지방안지가 아닌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시켰다.
아마와리는 자신의 야망을 가로막는 고사마루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적 음모를 선택했다. 그는 고사마루가 나카구스쿠성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행위를 반역의 증거로 조작해 쇼태구왕에게 보고했다.
당시 아마와리는 왕녀 백도태양(百度踏揚)과 혼인한 상태였기에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 결과 왕은 아마와리를 토벌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고사마루는 왕의 군대와 싸우지 않겠다는 충성의 선택 속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고사마루가 제거된 이후 아마와리는 슈리성까지 넘보며 반란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부인이자 왕녀인 백도태양에 의해 좌절되었다. 백도태양은 남편의 역심을 간파하고 시종 오니오오구스쿠(鬼大城)의 도움으로 슈리성에 탈출했다. 왕부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반격에 나섰으며, 아마와리는 가쓰렌성에서 토벌되어 생을 마쳤다.
이 내란은 충신과 야심가가 동시에 사라지는 결과를 낳으며 제1차쇼씨왕조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왕권은 군사적 지지층을 잃었고, 대신 행정과 재정을 담당하던 가네마루가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는 훗날 가네마루가 쇼엔왕(尚円王)으로 즉위하며 제2차쇼씨왕조를 여는 결정적 배경이 된다.
관찬사서에서는 아마와리를 반역자로 규정하지만, 가쓰렌지역의 전승에서는 지역발전을 이끈 지도자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 자체가 당시 류큐사회가 지녔던 권력구조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나카구스쿠성과 가쓰렌성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이 격동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고사마루와 아마와리의 난은 삼산통일 이후에도 완성되지 못한 중앙집권의 현실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1458년의 내란은 단순한 개인 간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통일왕국이 겪어야 했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분기점이다. 충성과 야망, 중앙과 지방의 균열은 결국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는 동력이 되었으며, 이는 류큐왕국사가 가진 역동성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