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0년 쇼엔(尚円)의 즉위는 류큐 역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권 교체였다. 농민 출신 관료 가네마루(金丸)가 국왕의 자리에 오르며 제1차 쇼 씨 왕조는 종언을 고했고, 이후 약 400년간 지속되는 제2차 쇼 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왕위 교체가 아니라, 혈통 중심 권력에서 관료·민심 기반 통치로 전환된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제2차 쇼 씨 왕조의 시조 쇼엔의 본명은 가네마루(金丸)이다. 그는 류큐 본섬 북부의 이제나섬(伊是名島) 출신으로, 기존 왕실 혈통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농민 가문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성실함과 판단력으로 지역에서 신망을 얻었으나, 시기와 갈등을 피해 슈리로 건너오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가네마루는 제1차 쇼 씨 왕조 제6대 국왕 쇼태구왕(尚泰久王) 시기에 관료로 등용되며 정치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재정 운영과 대외 실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왕실 재정과 외교를 총괄하는 어물성어쇄측(御物城御鎖側)이라는 핵심 직책을 맡게 된다. 이 시기 가네마루는 왕권이 아닌 관료 집단 내부에서 신뢰를 축적해 나간 인물이었다.
가네마루가 관료로 성장하던 시기, 왕조의 정점에는 제1차 쇼 씨 왕조의 마지막 군주 쇼토쿠왕(尚徳)이 있었다. 그는 1466년 기카이섬(喜界島) 원정을 단행하며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후 반복된 전쟁과 대규모 토목 공사, 불교 사찰 건립으로 국가 재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쇼토쿠왕은 중신들의 간언을 배척하고 강압적인 정치를 이어갔으며, 이는 왕실 내부와 관료층의 이탈을 불러왔다. 가네마루 역시 국정 운영을 비판하다 일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 은둔은 오히려 그를 ‘왕조 이후를 대비할 수 있는 인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469년, 쇼토쿠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슈리성은 심각한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일부 신료들은 왕세자를 옹립하려 했으나, 아사토 츠후야(安里大親)을 중심으로 한 다수 중신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왕실 혈통보다, 실무 능력과 신망을 갖춘 인물을 새 군주로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가네마루가 추대되었고, 쿠데타에 가까운 정변을 통해 제1차 쇼 씨 왕조의 왕족들은 축출되거나 제거되었다. 이는 류큐 역사상 전례 없는 방식의 정권 교체였다.
가네마루는 즉위 후 스스로를 쇼엔(尚円)이라 칭하고, 명나라에 책봉을 요청했다. 그는 새 왕조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왕조의 성씨였던 ‘쇼(尚)’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는 명나라와의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대외적으로 왕조 교체를 최소화함으로써 국제 질서 속에서의 정통성 논란을 차단했고, 이로 인해 류큐에서는 가네마루 즉위 이전을 제1차 쇼 씨 왕조, 이후를 제2차 쇼 씨 왕조로 구분해 서술하게 되었다.
쇼엔은 재위 7년 동안 내정 안정에 집중했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권력 구조를 재정비하고, 재정 회복과 관료 체제 강화를 추진했다. 1476년 그의 사망 이후 왕위는 잠시 동생 쇼센우이(尚宣威)가 이어받았으나, 곧 쇼엔의 아들 쇼진(尚真)에게 양위되며 류큐의 전성기가 열리게 된다.
쇼엔의 즉위는 혈통 중심 지배에서 관료 국가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제2차 쇼 씨 왕조는 이후 19대, 약 410년에 걸쳐 류큐를 통치하며 해양 왕국 오키나와의 정치·문화적 정체성을 완성하게 된다.
1470년 쇼엔(尚円)의 즉위는 류큐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변화였다. 이는 단순한 왕위 계승이 아니라, 민심과 행정 능력이 권력의 정당성이 되는 새로운 정치 질서의 출발이었다. 농민 출신 국왕이 연 왕조는 이후 400년간 류큐를 지탱하며, 오키나와가 독자적인 역사 궤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