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째 모든 언론이 인사 청탁 논란 속 ‘누나’라는 호칭으로 들끓고 있다. 대통령실 비서관이 “훈식이 형이랑 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정치권은 이 호칭에 대한 논란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누나'라는 말 하나가 권력 농단의 단서로 해석되고, 고발과 책임론이 오가며 나라 전체가 뜨겁다. 결국 해당 발언을 한 비서관은 직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나는 이 논란을 접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전혀 다른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이 말하는 '누나'는 인사권, 권력, 계산, 의혹의 언어로 사용되지만, 내게 ‘누나’라는 말은 애초 그런 세계의 단어가 아니었다.
우리 집에는 친누나가 없었지만, 사촌 누나는 여럿이었다. 그중에서도 어린 시절의 선자 누나는 지금도 가장 선명한 사람이다. 여름이면 밭가 소나무 숲 그늘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나는 늘 누나 곁에 앉아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너머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누나는 손에 묻은 흙먼지를 앞치마로 닦고, 내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곤 했다.
그때의 누나는 현실보다 조금 더 가벼운 존재였다. 아이의 마음속 누나는 생리현상조차 초월한, 더러움을 모르는 천사 같은 존재였기에 나는 누나가 똥을 안 싼다고 믿었다. 누나가 없는 집에서 홀로 만들어낸 판타지였지만, 그 판타지는 내 기억 속에서 아직도 반짝인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히 또 다른 선자 누나를 만났다. 집이 멀었던 나를 그 누나 집은 자연스럽게 받아주었고, 함께 지낸 날도 많았다. 요즘 같으면 의아할 상황이지만, 그때는 그저 ‘정(情)’이었다. 아침이면 누나는 발뒤꿈치로 내 발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일어나라, 밥 식는다.” 잔소리 같았지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나는 가방을 열어 엉킨 책들을 정리해주고, 밥그릇 위에 김치를 올려주며 “이렇게 먹어야 큰다”고 했다. 누나의 오빠였던 현민 형도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그 집은 나에게 잠자리와 밥, 그리고 따뜻한 보호막 그 자체였다.
이 누나는 소나무 그늘의 천사와는 달랐다. 때로는 조금 짜증을 내기도 하는 현실적인 동시에 다정한 사람이었다. 삶을 챙겨주는 보호자이며, 인간계와 천사계의 경계쯤에 서 있는 사람. 내가 ‘누나’라는 말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누나’라는 말의 본래 자리는 따뜻함이었다. 동네 언니도 누나였고, 이웃집 누나는 때로 친누나보다 더 다정했다. 그 말에는 보호의 기운, 체온, 그리고 생활의 냄새가 스며있었다.
그래서 지금 뉴스에서 들끓는 ‘현지 누나’를 볼 때마다 묘한 어긋남이 생긴다. 누나라는 말이 원래 품고 있던 따뜻함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화면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계산의 언어, 실세의 상징, 권력의 그림자 속에 박힌 호칭. 호칭 하나가 공적 영역에 빨려 들어가면, 그 말은 순식간에 의혹의 단어가 되어버린다. 한 단어의 의미 자체가 이렇게까지 오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그러나 내 누나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세상이 권력과 의혹의 프레임으로 '누나'를 해석하고, 호칭 하나에 민감해져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을지라도, 내 마음속 두 선자 누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누나는 여전히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순수한 노래를 부르고 있고, 또 한 누나는 내 책가방과 밥그릇을 챙기며 아침 햇살 속에 서 있다.
사람들이 ‘부적절한 누나’를 따지며 소란을 피우는 동안에도, 내 누나들은 그때 그 자리, 흙냄새와 김치 한 점의 온기 속에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머물러 있다. 내가 기억하는 '누나'는 결국 권력의 호칭이 아니라, 순수한 정(情)과 체온의 언어인 것이다.
[문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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