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묘지의 평화와 식탁의 평화
우리는 흔히 '평화'라고 하면 갈등이 없는 상태, 즉 아무런 소음도 분쟁도 없는 조용한 상태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의미의 평화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곳은 역설적이게도 '공동묘지'다. 죽어 있는 평화다. 반면, 아이들이 떠들고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저녁 식탁은 시끄럽고 분주하지만, 그 안에는 생동감 넘치는 평화가 있다.
히브리어 '샬롬(שָׁלוֹם, Shalom)'은 전자의 정적인 고요함이 아니라 후자의 역동적인 조화를 뜻한다. 인생이 고달픈 이유는 내 삶에 문제가 생겨서라기보다, 삶의 여러 조각이 서로 맞지 않아 삐걱거리기 때문이다. 일과 가정, 이상과 현실, 나와 타인... 이 흩어진 조각들을 가져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끼워 맞추는 작업, 그것이 바로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진짜 평화의 시작이다.
빚을 갚고 완성하다, '샬람'
'샬롬'의 어근은 '샬람(שָׁלַם, Shalam)'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우리가 아는 평화와는 결이 다른 아주 실무적인 뜻들이 튀어나온다. 바로 '지불하다(to pay)', '보상하다(to make good)', '완성하다(to finish)'이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누군가에게 빚을 졌을 때, 그 빚을 완전히 갚은 상태를 '샬람'이라고 했다. 즉, 관계 속에 있던 채무나 결핍이 해결되어 '모자람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 곧 평화다. 또한, 이 단어는 건물을 지을 때 마지막 돌을 놓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샬롬은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온전함의 현존'이다. 평화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진 관계를 수리하고(צְדָקָה, 쩨다카),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חֵן, 헨), 흩어진 진실을 모으는(אֱמֶת, 에메트) 적극적인 '마무리 작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통합과 시스템적 조화
현대 심리학의 거장 '칼 융(Carl Jung, 1875-1961)'은 인간의 성숙을 '개성화(Individuation)', 즉 내면의 흩어진 자아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온전한 전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적 '샬롬'이다. 내 안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제자리를 찾아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느낀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샬롬은 '사회적 자본'의 최정점이다.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져야 할 책임을 다하고(샬람), 억울한 자가 없는 상태가 될 때 공동체는 비로소 번영한다. 시스템 이론가들은 이를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 부른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샬롬의 모델이다.
개혁교회 신학에서 샬롬은 창조의 본 모습이자 종말의 완성형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 모든 피조물은 '샬롬'의 상태였다. 죄로 인해 그 질서가 깨졌고, 우리가 지난 9주간 다룬 키워드들은 그 깨진 질서를 회복하여 다시 '샬롬'으로 돌아가기 위한 지도였던 셈이다.
10가지 키워드가 샬롬으로 수렴되는 이유
우리가 지금까지 다뤄왔던 키워드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 자비(רַחֲמִים)로 타인을 품고, 정의(צְדָקָה)로 굽은 것을 펴며, 지혜(חָכְמָה)로 길을 찾는다.
* 은혜(חֵן)로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진리(אֱמֶת)로 삶의 뼈대를 세우며, 구원(יְשׁוּעָה)으로 인생의 평수를 넓힌다.
이 모든 개별적인 덕목들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가 바로 샬롬이다. 자비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평화는 무르고, 정의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평화는 차갑다. 지혜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평화는 사기이며, 진리만 있고 은혜가 없으면 평화는 폭력이 된다. 이 '자비'와 '정의'와 '지혜'와 '은혜'와 '진리'와 '구원'을 포함한 다양한 색실들이 '샬람(완성)'이라는 바늘에 꿰어져 하나의 아름다운 양단으로 직조될 때, 우리는 그것을 비로소 '평화로운 인생'이라 부를 수 있다.
성공이란 단순히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영역(건강, 관계, 재정, 영성)이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고 고르게 '샬롬'을 이루는 상태다. 가장 높은 곳에 있어도 내면이 조각나 있다면 그는 불행한 자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모든 조각이 제자리를 찾았다면 그는 가장 성공한 '샬롬의 사람'이다.
당신의 마지막 조각은 무엇인가?
지금 당신의 삶에서 유독 비어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혹은 아직 갚지 못한 마음의 빚(Shalam)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평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오늘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과 한마디, 미루어두었던 정직한 결단, 그리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용납하는 자비로운 시선들이 모여 완성되는 '인생의 작품'이다.
완벽한 인생은 없다. 하지만 온전한(Shalom) 인생은 가능하다. 깨진 조각이라고 해서 쉽게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조각들을 다시 모아 '샬람'의 정성으로 이어 붙이길 바란다. 흉터조차 무늬가 되는 그 온전함의 끝에서, 당신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아침인 '샬롬'을 맞이하게 되리라.
지금까지 여러분은 히브리어 단어들을 통해 마음속에 작은 씨앗들을 심어 왔다. 이 씨앗들이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싹을 틔워, 결국 '샬롬'이라는 풍성한 숲을 이루길 간절히 소망한다.
"샬롬(Shalom), 당신의 모든 조각이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