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동의 쇳소리 속에서 피어난 침묵과 위로의 미학
우리는 흔히 ‘철(Iron)’을 차갑고, 단단하며, 타협하지 않는 물질로 기억한다. 그러나 여기, 그 차가운 물성(物性) 이면에 숨겨진 뜨거운 온기를 어루만지는 아티스트가 있다. 20여 년간 종이와 활자의 2차원 세계에 머물다, 쉰이 넘은 나이에 거친 쇳가루 날리는 문래동 골목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 설치작가 이한주다.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 특집 기획 "OO을 사랑한 아티스트"의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철이라는 강인한 언어를 통해 삶의 연약함을 보듬는 “철을 사랑한 아티스트’ 이한주 작가를 만났다. 현재 서울 마곡에 위치한 ArtNGallery 개관전에서 관객을 맞이하고 있는 그녀와 나눈 대화는 단순한 인터뷰를 넘어, 상처 입은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깊은 위로의 서사였다.

힐링 포레스트, 쇳소리 속에 지어진 마음의 쉼터
문래동 3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과 회색빛 철공소들 사이로 유독 시선을 끄는 공간이 있다. 이한주 작가의 작업실이자 예술 공간인 ‘힐링 포레스트(Healing Forest)’다. 삭막한 철공소 골목에 놓인 의외의 하늘색 철재 프레임은 지나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곳은 단순한 작업실을 넘어 작가의 예술 철학이 구현된 물리적 실체다. 공장으로 사용되던 높은 층고의 공간은 이제 전시와 공연이 어우러지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모했다. 작가는 이곳을 도심 속 삭막한 일상에 지친 이들이 잠시 멈춰 서서 휴식을 취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치유의 숲’으로 정의한다. 쇳가루 날리는 노동의 현장 한가운데서 피어난 이 역설적인 숲은, 차가운 철도 사람의 온기를 품으면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공간이다.
운명적 조우: 철, 부모를 닮은 이중적인 온기
이한주 작가에게 철은 단순한 조형의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인생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만난 ‘구원’이자, 가족의 기억을 관통하는 매개체였다. 20년 넘게 북디자이너로 치열하게 살아가던 그녀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공황장애는 스스로를 단단하다고 믿었던 자아를 무너뜨렸다. 그때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거친 노동의 현장, 문래동 철공소 골목이었다.
“공황장애를 겪던 시기, 문래동은 제게 모순적인 장소였습니다. 쇳소리와 먼지가 가득했지만, 묵묵히 공구를 건네주시던 철공소 사장님들의 과묵한 배려 속에서 저는 오히려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시간을 얻었죠.”
그녀는 철이 자신의 부모님을 닮았다고 고백한다. 말없이 버티는 단단함과 무게는 아버지를, 뜨거운 열을 만나면 녹아내려 다른 재료를 품고 다시 굳어지는 포용력은 어머니를 닮았다. 작가는 이 물성을 통해 “강해 보이는 제 안에도 차갑고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철은 그녀의 언어가 되었다.
문래에서 파리까지, 확장되는 치유의 숲
이 작가의 예술적 세계관이 집약된 결정적 순간은 2022년 첫 개인전 <문래화해(花海)>였다. ‘꽃의 바다’이자 ‘화해(和解)’를 중의적으로 담아낸 이 전시에서 그녀는 철공소 골목의 삭막함 속에 꽃과 빛을 심었다. 철공소 장인들과 예술가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생겼던 긴장 위에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제안한 이 전시는 그녀를 로컬 크리에이터를 넘어 진정한 아티스트로 각인시켰다.
이후 그녀의 행보는 거침없이 확장되었다. 지난 2025년은 이한주 작가에게 도약의 해였다. ‘2025 09 Salon Paris Edition’을 통해 예술의 본고장 파리에서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선보이며 호평받았고, ‘2025 충주 시민의 숲 정원전’에서는 어머니의 사랑을 테마로 한 공간으로 장려상을 수상했다. 또한 ‘제1회 Art Spoon 글로벌 신진작가 공모전’에서 Spotlight Award를 거머쥐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문래동의 작은 골목에서 시작된 그녀의 치유 서사가 이제 세계 무대에서도 깊은 공감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Artist’s Masterpiece: 이한주의 인생작 3선
이 작가는 수많은 작품 중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투영하는 세 가지 작품을 꼽았다. 이들은 모두 가족과 내면의 심연을 다룬, 지극히 사적이고도 보편적인 이야기다.
▪️아버지의 딸 (Father’s Daughter, 2022)
작가는 이 작품을 “쉰여섯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목소리를 대신해 전화기를 두드리며 나눴던 침묵의 대화를 기억하는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의 강인함을 닮은 철 구조물 위에, 아버지가 사랑했던 목련의 이미지를 투영했다. 부식 페인트와 와이어를 사용해 세월의 질감을 표현한 이 작품은, 부재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그리움과 평안을 묵직하게 전달한다.
▪️엄마를 부탁해 (2023)
어부에게 쫓기면서도 새끼를 지키려다 끝내 함께 잡히는 어미 고래의 비극적 서사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랑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자기 방식으로 끝까지 자식을 품어왔던 어머니의 사랑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 마음’을 담았다. 차가운 갈바 철판과 와이어는 작가의 손을 거쳐 가장 뜨거운 모성애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심연 (Deep Abyss, 2022)
작가가 겪은 공황과 내면의 어둠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다. 어두운 공간, 차가운 철 파이프 위에 하얀 털실을 마치 상처를 꿰매듯 하나하나 엮어 나갔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철이 차갑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복적인 행위가 스스로를 보듬는 과정처럼 느껴졌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심연은 더 이상 무너지는 곳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공간으로 재해석되었다.
Imagination: 상상,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힘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AI 시대, The Imaginary Pocus가 천착해 온 ‘상상의 힘’은 작가 이한주를 통해 비로소 ‘회복의 힘’으로 다시 정의되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고유한 상상력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본지의 믿음에 대해, 이 작가는 단순한 창조를 넘어선 깊이 있는 통찰을 들려주었다.
“상상은 제게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쉽게 지나쳐 온 감각을 다시 불러오는 힘입니다.”
그녀는 효율과 정답을 제시하는 AI와 달리, 멈추고 바라보는 ‘느린 과정’을 택한다. 북디자이너 시절, 종이 위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을 다루던 감각은 이제 3차원의 공간에서 철과 철 사이의 ‘숨 쉴 틈’을 만드는 상상력으로 확장되었다. 그녀의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잃어버린 사유의 시간을 회복한다. 상상은 곧 나를 되찾는 과정인 것이다.

Epilogue: 당신은 이미 충분하다
이한주 작가는 현재 1월 28일부터 2월 2일까지 열리는 서울 마곡에 위치한 ‘ArtNGallery’ 개관전에서 철의 강인함과 자개의 연약함이 빚어내는 그림자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도 ‘힐링 포레스트’의 철학을 바탕으로, 공공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머무를 수 있는 ‘경험하는’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녀는 지금도 각자의 삶에서 단단한 철처럼 버티고 있을 독자들에게 잊지 못할 한마디를 남겼다.
“당신이 지금 버티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잘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차가운 철을 녹여 온기를 만드는 ‘철을 사랑한 아티스트’ 이한주. 그녀의 작업은 우리에게 말한다. 상처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와 함께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그녀의 힐링 포레스트는 지금도 문래동의 소음 속에서, 고요하고 단단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티스트 소개: 이한주]
20여 년간 북디자이너로 활동하다 문래동 철공소 골목에 둥지를 튼 설치작가다. 공황장애를 겪던 시기, 거친 노동의 현장에서 역설적인 평안을 얻은 후 차가운 ‘철(Iron)’을 치유의 언어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철에 꽃, 자개, 빛, 실 등 연약한 소재를 결합해 강인함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첫 개인전 <문래화해(花海)>를 시작으로 파리 '2025 09 Salon Paris Edition' 참여, '제1회 Art Spoon 글로벌 신진작가 공모전' Spotlight Award 수상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문래동 창작 공간 ‘힐링 포레스트’를 기반으로, 상처를 극복의 대상이 아닌 함께 숨 쉬는 과정으로 바라보며 관객들에게 깊은 위로와 회복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인간 중심 저널리즘을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