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산을 멈춘 아이는 숫자 앞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만의 자리가 등장하는 순간,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연필은 멈췄다. 세 자리 수까지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풀던 아이였다. 계산 속도가 느린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에 ‘12,345’ 같은 수가 나오자 아이는 문제를 끝까지 읽지 못했고, 이내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부모는 연습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아이 스스로도 자신을 “수학을 못하는 아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칭 현장에서 관찰한 이 아이의 모습은 달랐다. 아이는 계산을 시도하지 않았다기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가까웠다. 숫자가 커지는 순간, 머릿속에서 기준점이 사라졌고, 그 공백은 곧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계산 능력이 아니라, 숫자를 이해하는 구조에 있다는 판단이 섰다.
만의 자리는 ‘어려운 계산’이 아니라 ‘낯선 언어’였다
아이에게 12,345를 읽어 보라고 했을 때, 아이는 “일이삼사오”라고 말했다. 만, 천, 백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 숫자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연결되지 않았다. 숫자는 아이에게 의미 있는 단위가 아니라, 해석되지 않은 기호의 나열이었다.
많은 아이가 이 지점에서 학습 정체를 겪는다. 큰 수를 배우는 시기는 단순히 자릿수가 늘어나는 시기가 아니다. 숫자를 덩어리로 나누고, 구조로 이해해야 하는 전환점이다. 이 전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는 계산을 배우기 전에 이미 숫자 앞에서 위축된다.
계산을 가르치기 전, 숫자를 해체하는 시간
코칭의 첫 단계는 문제 풀이를 멈추는 것이었다. 대신 숫자를 계산 대상이 아니라 설명 대상으로 바꿨다.
“이 숫자는 얼마짜리 숫자일까?”
“이 안에는 만 원짜리가 몇 장 있을까?”
숫자를 돈, 블록, 상자 같은 실물 개념으로 바꾸자 아이의 반응이 달라졌다. 아이는 숫자를 쪼개어 말하기 시작했다. “만이 하나 있고, 천이 두 개 있고…”라는 문장이 조금씩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숫자를 말로 풀어내는 경험 자체가 핵심이었다.
‘읽기–나누기–붙이기’로 만든 숫자 구조
이후 코칭은 항상 같은 흐름으로 진행했다. 먼저 숫자를 천천히 읽고, 자릿값으로 나눈 뒤, 다시 하나의 수로 설명하게 했다. 이 단순한 루틴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큰 수를 만나도 “무엇을 하면 되는지” 알고 있다는 감각이 생기자, 아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계산은 그다음이었다. 숫자의 구조가 머릿속에 자리 잡자, 덧셈과 뺄셈은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다. 속도가 빨라졌기보다, 중간에 멈추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였다.
학습 정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코칭 4주 차, 아이는 처음 보는 다섯 자리 수 문제 앞에서도 연필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전히 천천히 풀었지만, 숫자를 나누어 쓰고 혼잣말로 읽으며 문제에 접근했다. 숫자를 피하지 않게 된 것이다.
만의 자리에서 멈춘 아이는 실패한 아이가 아니다. 숫자를 이해하기 위한 구조를 아직 설계받지 못했을 뿐이다. 학습코칭의 역할은 더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아이가 숫자를 해석할 수 있는 틀을 다시 세워 주는 데 있다.

큰 수 앞에서 멈춘 아이를 만난다면, 계산을 늘리기 전에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계산할까?”가 아니라,
“이 숫자는 어떤 숫자일까?”
그 질문에서 학습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