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
Q. 6. How many persons are there in the Godhead? A. There are three persons in the Godhea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God, the same in substance, equal in power and glory.
문 6. 하나님의 본체에 몇 위가 계신가? 답. 하나님의 본체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는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다.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요일 5:7)

관계라는 이름의 존재 양식, 홀로 계시지 않는 창조주
인간은 끊임없이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관계 속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입는다. 현대 심리학과 상담 현장에서 다루는 고통의 상당 부분은 '연결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고립은 우울을 낳고, 잘못된 결합은 집착과 구속을 낳는다. 인문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타인이라는 거울 없이는 자신을 온전히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관계에 목마른 존재로 지어졌는가? 그 해답의 실마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 즉 '삼위일체(Trinity)'에서 찾을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며 '삼위(三位)'를 언급한다. 기독교 신학의 가장 신비로운 영역인 삼위일체는 단순히 숫자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관계적'임을 선언한다. 라틴어 '트리니타스(Trinitas)'는 셋이 하나를 이룬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 안에서 완벽한 사랑의 사귐이 영원부터 존재해 왔음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가 믿는 신이 정태적이고 고립된 군주가 아니라, 역동적인 사랑의 교제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관계를 갈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관계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본체와 위격의 조화 차이를 인정하며 하나가 되는 신비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핵심 용어는 '본체(Substance)'와 '위격(Person)'이다. 헬라어로 본질 혹은 본체를 뜻하는 '우시아(οὐσία, ousia)'는 하나이지만, 개별적인 위격을 뜻하는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는 셋이다. 이는 신학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이 역할과 존재 방식에서는 구별되나, 그 신성과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는 조금의 차등도 없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학적 원리는 현대 상담심리학의 '분화와 통합' 원리와 맞닿아 있다. 건강한 관계란 각자의 개별성(위격)을 유지하면서도 깊은 정서적 유대(본체)를 이루는 것이다. 만약 개별성이 사라지면 '융해(Fusion)'가 되어 서로를 억압하게 되고, 유대감이 사라지면 '단절'이 되어 소외를 경험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하나가 되는 완벽한 모델을 보여주신다.
비즈니스 리더십에서도 이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조직의 목표(본체)는 하나이지만, 그 안에서 각 구성원의 고유한 재능과 직무(위격)가 존중받을 때 비로소 조직은 유기적인 생명력을 갖게 된다.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다는 선언은 서열 중심의 수직적 구조를 넘어, 기능적 차이를 인정하되 존재적 가치는 평등하게 대우하는 '파트너십 경영'의 근거가 된다.

페리코레시스 비즈니스와 소통의 원형이 되는 상호침투
교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의 역동적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상호침투', '상호내주' 혹은 '서로 주위를 춤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양새로 말하자면, 강강술래와 같은 '원무'라 말할 수 있다. 삼위의 하나님은 서로 안에 거하며, 서로를 위해 자신을 열어주시고, 함께 기쁨의 춤을 추신다. 삼위일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의 대상이다. 하나님 안의 완벽한 관계를 묵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기적 자아를 넘어 타인을 향한 진정한 환대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호 주체적인 소통은 현대 조직론에서 말하는 '시너지(Synergy)'의 극치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정보의 독점은 비효율을 낳고 소통의 부재는 거래 비용을 증가시킨다. 반면, 삼위일체적 원리가 적용된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각 부서와 개인이 서로의 전문성을 신뢰하며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한다. 이는 단순히 협력을 잘하는 수준을 넘어, 상대방의 성공이 곧 나의 영광이 되는 상태를 지향한다. 상담심리에서도 치료적 관계의 핵심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내면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함께 머무는 '공감적 상호침투'에 있다. 하나님께서 삼위 간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장하셨듯이,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자아라는 성벽을 낮추고 타인의 존재를 자신의 삶 속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경쟁과 시기라는 파편화된 세상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다.
공동체적 존재로의 부르심과 영광의 참여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나는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다. 우리는 고립된 단독자로 창조되지 않았으며, 타인을 딛고 올라서는 경쟁자로 부름받지도 않았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거룩한 사랑의 춤 사위에 초대받은 공동체적 존재다.
현대인의 고질적인 외로움은 단순히 옆에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관계의 원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성취하시며, 성령 하나님이 적용하시는 그 완벽한 구원의 협력은 우리에게 '협력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이제 일터와 가정을 삼위일체적 공간으로 재구성해보자. 차이를 시기하는 대신 조화의 기회로 삼고, 각자의 위엄을 존중하며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 삼위일체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깨어진 세상을 치유하고 인간다움을 회복시키는 가장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