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장문포해전 당시 원균 전적지 외질포, 오비질포, 정심포곶 위치 비정

이봉수

장문포해전은 임진왜란 강화협상 중이던 1594년 9월 28일(이하 음력)부터 10월 7일까지 거제도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일대에서 벌어졌던 해전이다. 삼도수군 연합함대와 곽재우, 김덕령, 한명련, 주몽룡 등 의병부대 육군이 합동작전을 펼쳐 장문포왜성에 웅거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한 전투였다.

 

장문포해전의 정확한 경과와 전과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함께 원균의 장계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선조실록 56권 1594년 10월 8일 자 기사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난중일기부터 살펴보자. 이순신 장군은 1594년 9월 27일 한산도 북단의 적도(현재의 화도) 앞바다에서 곽재우 등 육군장들과 합류했다. 28일에는 바람이 순탄하지 못하여 견내량 북쪽 흉도에서 진을 치고 잤다. 29일에는 육군장들을 태운 이순신 연합함대가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로 돌진해 들어갔으나, 적은 높고 험한 곳에 웅거하고 나오지 않아 빈 배 2척만 불태우고 나와 칠천량에서 밤을 보냈다.

 

10월 1일 새벽에 장문포로 다시 진출한 이순신 장군은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장문포에 머무르게 하고  충청수사 이순신(李純信)과 함께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진출했다. 영등포의 적들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아 저녁에 장문포로 돌아왔는데, 사도 2호선이 적의 공격을 받아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저녁에는 역시 칠천량에서 밤을 새웠다.

 

10월 2일에는 선봉의 배 30척이 장문포로 가서 적의 형세를 보고 오도록 했고, 3일에도 적이 항전하지 않아 다시 칠천량으로 돌아와 밤을 새웠다. 4일에는 곽재우 등이 이끄는 육군 수백 명이 상륙을 하고 바다에서도 합동작전을 펼쳤으나, 한 무리의 적이 칼을 휘두르며 반격해 오자 육군은 배로 내려왔고 저녁에 다시 칠천량으로 물러났다.

 

5일에는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이순신 연합함대는 칠천량에 그대로 머물렀고,  6일 다시 선봉을 장문포로 보냈더니, 왜군이 패문을 땅에 꽂아 놓았는데 "일본은 명나라와 장차 화친할 것이니 싸우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했다. 이날 영등포의 왜군 1명이 칠천량 산기슭으로 와서 투항했고 삼도수군 연합함대는 진을 흉도로 옮겼다. 7일 곽재우 등 육군장들은 육지로 돌아갔다. 8일 이순신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장문포를 지나 흉도에 이르러 띠풀 260동을 베어 자정 무렵에 한산도로 복귀했다. 이상이 난중일기 기록으로 살펴본 장문포해전의 전말이다.

 

장문포왜성 답사 중인 필자

 

다음은 장문포해전 관련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 내용을 싣고 있는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1594년) 10월 8일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의 장계에,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에 둔거한 적세(賊勢)와 접전한 절차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2일 평명(平明, 날이 밝을 무렵)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된 것이 필시 둔처(屯處)한 왜병을 청원(請援)한 것이었습니다.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우리 병사들이 강개(慷慨)하여 진퇴(進退)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辰時)에 주사(舟師, 수군을 주사라고 했음)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 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城)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 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步)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設備)는 매우 흉험(兇險)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陸兵)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舟師)로서는 다시 어떻게 끌어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巨濟)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陸戰)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4일 묘시(卯時)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 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玄勝字銃筒)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精銳船)을 영등(永登)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육병장 등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가서 직접 형세를 고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서 7일에 돌아갔고, 신 및 주사(舟師)는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5일 휴병(休兵)할 때에 신이 거느린 사후선(伺候船)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곶(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6일 묘시(卯時)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과 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守門將)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와서 수급(首級)을 베어 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있던 잡물(雜物)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櫓) 등은 싣고 왔다.’ 하였습니다.

 

다시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 와서 증거품으로 하라고 하였더니, 7일에 돌아와 고하기를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산골짜기로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그중에 한 명이 다급하게 되자 칼을 풀고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의 중위장(中衛將)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6일에 행군하여 왜적이 숨어 있는 해변에 복병하고 있으면서 출몰하는 것을 엿보아 재빠르게 배를 움직여 돌진해서 1명을 생포해 왔고, 선봉장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적진에 달려들어가 왜인이 쓴 작은 판(版)을 탈취해 왔는데, 판본(版本)은 통제사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한산(閑山)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위의 선조실록 기록을 비교하면서 살펴보면 장문포해전의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난중일기보다는 원균 장군의 장계 내용을 인용한 선조실록 기록이 훨씬 더 자세하다. 오비질포 해전에서 적선 2척을 불태운 내용은 난중일기에는 없다. 상륙전을 펼칠 때 선봉으로 원균 부대가 들어가 종일 치열한 수륙합동전을 펼친 내용도 실록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평소 이순신 장군의 해전 현장을 답사하면서 사료에 등장하는 지명이 현재 지명으로 어디인가를 비정해온 필자는 위의 선조실록 기사에 나오는 '오비질포(吾非叱浦)'와 '외질포(外叱浦)' 그리고 '정심포곶(廷深浦串)'이 어디인지를 살펴보았다.

 

우선 지명에 등장하는 '질(叱)' 자는 사이시옷 발음이 나는 이두식 표기다. 따라서 '외질포(外叱浦)'는 '욋포' 또는 '욋개'로 발음해야 하고, '오비질포(吾非叱浦)' 역시 '오빗포' 또는 '오빗개'로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제2차 당항포해전 당시 적선 2척을 격파한 시구질포(柴仇叱浦, 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요장리 주도 마을, 속칭 왜꽂이)도 '시굿포' 또는 '시굿개'로 발음한다.

 

선조실록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우선 오비질포는 현재의 오비산업단지가 있는 거제시 연초면 오비리로 비정할 수 있다. 지역의 주민들이 '오빗개'라고 불렀던 것을 원균 장군은 장계에서 한자로 차자표기 하여 오비질포(吾非叱浦)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심포곶(廷深浦串)은 정황상 오빗개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깊숙한 포구의 돌출부로 볼 수 있다. 원균은 읍성이 있었던 고현 일대로 사후선 4척을 보내 정찰하다가 오빗개 일대에서 적선 2척을 만나 격멸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심포곶은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일대로 추정된다.

 

다음은 외질포(外叱浦)에 대해 알아보자.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은 장문포에서 싸우다가 밤이 되면 칠천량으로 가서 잤다고 했다. 삼도수군이 함께 움직였으니 원균 장군이 언급한 외질포는 칠천량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외질포(外叱浦)로 비정(比定)되는 칠천도 옥계 마을

 

칠천도(漆川島)는 음차와 훈차 표기를 넘나들면서, 온천도(溫川島) 또는 칠내도라고도 했다. 이순신 장군도 견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서 한산대첩 직후 안골포의 적을 치러 가면서 하룻 밤 자고 간 곳을 거제땅 온천도라고 했다. 칠천(漆川)은 순우리말로 '옻내'다. 옻내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면 '온내'가 되고, 이것이 다시 '온천(溫川)'으로 차자표기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칠천도에 있는 옥계 마을은 '옻개(漆川)'를 한자로 차자표기하는 과정에서 약간 변용되어 옥계(玉溪)가 된 것으로 보인다. 원균 장군이 언급한 '욋개(外叱浦)'는 순우리말 '옻개'와 서로 넘나드는 발음이다. 결론적으로 선조실록에 나오는 외질포(外叱浦)는 현재 지명으로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옥계 마을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장문포해전 당시 칠천도 옥계 마을은 조선수군의 모항 역할을 했다. 삼도수군이 낮에는 장문포로 가서 싸우고 밤이면 칠천량으로 물러나 쉬면서 다음날의 전투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계 마을 서측에 있는 꽃밭구미(花田龜尾)라는 곳은 조선수군이 배에서 내려 밥도 해먹고 휴식을 취했던 장소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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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2.05 11:03 수정 2026.02.0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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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