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한양의 의금부 옥문을 나와 그의 둘째 백의종군을 시작하였다. 충무공은 같은 해 6월 초 경상도 초계군(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에 있는 도원수 권율의 진영에 도착한 뒤 칠천량해전이 일어난 7월 중순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도원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였다.
충무공이 도원수 진영에 도착하고 며칠 뒤인 6월 8일 도원수 권율은 충무공에게 박성이라는 인물이 쓴 상소와 사직서 초고를 보여주었다. 다음은 그 일이 서술된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6월 8일
점심을 먹은 뒤 원수(도원수 권율)가 진에 이르렀는데, 나도 가서 만났다. 종사관이 원수 앞에 있었고 (나는) 원수와 한참 동안 이야기하였다. 원수가 박성의 상소와 사직서 초고를 보여주었는데, 박성은 원수의 처사가 허술하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원수는 불안하여 체찰사(이원익)에게 글을 올렸다. 또한 (박성의 상소에 있는) 여러 사항과 조목을 보고 저물녘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저녁 식사를 걸렀다.
[원문] 㸃後 元帥到陣 余亦徃見. 從事在元帥前 与元帥話到移時. 元帥示以朴惺上章辞職草 則朴惺多陳元帥處事之疎脫. 元帥不自安 而上章于体相矣. 又見進伏等項事条件 到暮還來. 氣甚不平 廢夕食.
위 기록에 언급된 박성(朴惺, 1549~1606)의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하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박성의 행적은 정경운의 『고대일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같은 당대 사료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문집 『대암집』에 수록된 「소모밀양사민통문(召募密陽士民通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소집한 격문으로서 당시 의병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위 『난중일기』에 언급된 박성의 상소(上章)는, 그가 1597년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논시폐소(論時弊䟽)」를 가리킨다. 「논시폐소」는 작성 일자가 『대암집』에 1597년 5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 안에는 도원수 권율의 처사가 ‘허술하다(疎脫)’라는 비판이 대여섯 차례 제기되어 있다. 「논시폐소」의 작성 일자가 위 『난중일기』 날짜 직전이고, 허술하다(疎脫)’라는 비판이 『난중일기』 기록에도 언급되므로 박성의 상소가 「논시폐소」를 가리킴은 틀림없다.
「논시폐소」는 당시의 폐습과 그에 대한 대책을 친정토(親征討)·휼민은(恤民隱)·신상벌(信賞罰)·엄군법(嚴軍法) 등의 16개 조로 나누어 자세히 서술한 상소문이다. 이 글은 박성의 문집 『대암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뛰어난 문장력을 발휘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박성이 영남의 퇴계, 남명, 내암, 한강학파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불렸을 정도로 학문적 역량을 가졌던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글이다. 박성의 학문 세계를 고찰한 「대암 박성의 사물인식방법과 의식지향」이라는 논문도 출간되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여기서 잠시 『난중일기』의 원문 '又見進伏等項事条件'의 해석에 관해 설명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노산 이은상은 그가 역주한 『난중일기』 번역서에서 이 문장을 '또 복병에 관한 사항 등의 서류를 보고'라고 해석하였고, 이후 다른 많은 『난중일기』 번역서들이 이 해석을 따르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이은상이 『난중일기』에 언급된 박성의 상소가 「논시폐소」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인 듯하다.
박성은 「논시폐소」의 내용을 16개의 많은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면서, ‘伏願’·‘伏惟’·'伏望' 등 ‘伏(엎드려)-’와 같은 표현을 글 전체 내용에 40차례나 사용하였다. 그는 임금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기주장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논시폐소」의 내용을 고려하면, 『난중일기』에 서술된 '又見進伏等項事条件'는 '또한 (박성의 상소에 있는) 여러 사항과 조목을 보고'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대암 박성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도원수 권율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임진왜란 강화교섭 시기 명나라 군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금지한 까닭으로 권율은 마음대로 군사 작전을 벌이지도 못하였으며, 육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군사 관련 문제에서도 손발이 묶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도원수 권율이 임진왜란 초기 이치 전투, 독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큰 전공을 세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박성의 비판은, 조선시대 일부 문관들이 무관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조실록』에 수록된 도원수 권율에 대한 사관(史官)들의 사론(史論)이 극과 극을 달리는 점만 살펴보아도, 당시 무관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문제가 많았던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선조실록』 권68, 선조28년-1595년 10월 9일 무신 6번째 기사
사람됨이 소탈(疎脫)하여 도략(韜略)에는 본디 어두웠는데 논공으로 곤임(閫任)에 올랐으나 계책을 낸 것이 없었다. 중권(重權)을 잡은 지 여러 해 되었으나 위망(威望)이 도리어 꺾이었으니, 적을 헤아리고 승리를 취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아니다. 행주에서의 한 번 승첩은 천행이 아니라면 될 수 있었겠는가?
『선조실록』 권86, 선조30년-1597년 3월 30일 경신 1번째 기사
사람됨이 침착 진중하고 도량이 넓으며 용모에 위엄이 있었다.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관인(寬仁)하니 사졸(士卒)들이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독왕산성(禿旺山城)을 지키자 경기 백성들이 기대를 모았고, 행주대첩으로 중국까지 이름이 났으니 옛날 유장(儒將)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그러나 거칠고 방탕하여 술에 빠져 장군의 책무(責務)를 버렸으니, 이는 대개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위는 『선조실록』에 수록된 도원수 권율에 관한 두 가지 사론이다. 이 두 사론이 정말 같은 사람에 관한 것인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상반된다. 임진왜란 시기 권율이 이룬 전공에 대한 평가와 배경은 이미 수많은 학술 자료와 TV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굳이 두 사론 가운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후자의 사론 마지막 부분에 서술된 '대개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라는 문구가 임진왜란 시기 도원수 권율이 처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박성은 「논시폐소」에서 도원수 권율뿐만 아니라 충무공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1597년 초에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때 조선 수군이 공격하지 않은 점에 대해 충무공의 책임으로 돌리며 극언까지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등을 이유로 충무공이 통제사에서 파직된 사건이 일본군 계략에 의한 것임은 훗날 밝혀졌으니, 박성의 비판은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충무공이 『난중일기』에서 박성의 상소를 언급한 일기 가장 마지막에서 '몸이 몹시 불편하여 저녁 식사를 걸렀다'라는 글을 쓴 이유는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듯하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송군, 『청송인물지 수록자료』
이은상 역주, 『난중일기』, 1977, 대학서림
최은주, 「대암 박성의 사물인식방법과 의식지향」, 『영남학』 78, 2021,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한국고전종합DB, 박성(朴惺)의 『대암집(大菴集)』
한국고전종합DB,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
한국고전종합DB, 조경남(趙敬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