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칼럼, " 한상동 목사 서거 50주기"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한상동 목사의 서거(1976년) 50주기를 맞는다. 한상동 목사는 일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던 이기선 목사의 지도 아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교회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 6년의 옥고를 치뤘다. 그는 이른바 <산순교> 자가 되어, 끝까지 회개 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의 정통신앙을 지키는 중심에 섰었다. 요즘 국회가 <교회 폐쇄법>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항거하는 목사님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 일본이 이 나라를 삼키고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교회의 순결성과 진리를 지키려는 목사님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벌렸다. 당연히 당시 일본 정부는 정권의 개인 헌병들과 경찰을 통해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자를 모두 불법 체포, 감금했다. 1938년 27회 장로교 총회에 경찰들이 총대 옆에 한 명씩 맡아 윽박지르고 협박하여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총회가 끝난 즉시 준비된 택시에 4명씩 짝을 지어 신사에 바로 가서 절을 했던 비운의 역사가 있다. 


나라를 뺏기고, 일본 정부가 들어서니 교회가 그들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그래서 일본제국은 교회를 완전히 황국화 해버리고, 예배 순서를 변경시켜 <국가 봉창> <궁성 예배> <대동아 전쟁 필승 기도> <황국 신민의 맹세 재송> <우미 유가바 합창> 그다음에 찬송가 1장과 사도신경을 외우고 예배를 드렸다. 말하자면 국가 지상주의로 천조 대신을 먼저 섬기고, 예배를 드렸던 한국 교회의 민낯을 보았다. 정치가 교회를 지배하면서, 정치가 하고 싶은 대로 이끌어 갔다. 일본 정권은 그래서 미국의 <정교분리 정책> 즉 「정권은 아무리 바뀌어도 교회를 간섭하거나 예배 행위를 건드릴 수 없다」라고 한 말을 뒤집었다. 그래서 일본 당국은 선교사들을 쫓아내었다. 그리고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목사들은 하나둘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는 출옥 성도들을 많이 만났다. 산순교자 한상동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신학을 결심했고, 신학교 시절에는 한상동 목사님의 성경 강의를 들었다. 나는 그의 감화력과 그의 신앙 노선을 지금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1960년대 초에 나는 출옥 성도 황철도 목사님, 손명복 목사님과 함께 했고, 이인재 목사님으로부터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박윤선 목사님을 26년 가까이 모셨다. 1960년대 초, 한상동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은 헤어졌다. 박윤선 목사님은 ‘진리를 지킬 수만 있다면, 교회 건물은 양보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상동 목사님은 ‘진리 진영의 교회는 절대로 교회당을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1980년에 박윤선 목사님은 총신의 사태를 견디지 못해, 합신(合神)으로 옮겼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1987년 10월에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행사에서 그의 설교가 마지막이었고, 그 후 병을 얻어 1988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7년 11월 25일에 우리 집에 오셔서 유언으로 <기도일관>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나는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목사님 두 분 모두에게 설교를 듣고 강의를 들었다. 


한상동 목사님에 대한 여러분의 표현을 보면 이렇다. <김경래> 장로의 말은, 

 「한상동 목사님은 참 좋은 목사였습니다.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참 목자의 상을 보였습니다. 언행이 일치되는 성직자들이 세상에 적지 않지만, 그이는 언제나 진실했습니다. 표리가 없는 인생을 남겼습니다...한 목사님은 심육 간에 고독하셨습니다. 그러나 밝고 빛난 <좁은 길>을 가셨습니다. 일제 말 옥중 생활에서 연단을 받으셨기에 소용돌이치는 해방 후의 교회에서도 진리의 파수꾼을 견고하게 가설(架設)할 수 있었습니다」


또 박윤선 박사는 한상동 목사를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故 한상동 목사께서 일찍이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한국 교회의 역사를 빛낸 것이다. 그가 투옥되어 6년이란 긴 세월 동안 고난을 참으시며 끝까지 승리한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더욱 그가 8.15 해방 후에 출옥한 뒤에 주님을 섬기는 동안, 언제나 겸손하여 자기의 과거 수난에 대하여 침묵한 것은, 역시 주님만 높이고자 한 그의 믿음이라고 본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해방된 다음해에 그와 함께 고려 신학교를 시작하여 1960년까지 15년 동안 동역하는 중에 매사에 있어서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쓰던 그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한상동 목사님의 설교를 여러 번 들었지만, 나는 그가 강단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벌써 감동을 주었다. 설교는 말이 아니고 설교자와 청중의 영적 소통이 먼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상동 목사님의 설교는 문장이 짧다. 그리고 선포 적이었다. 그리고 한 목사님은 강단은 거룩한 곳이기에,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갖고 강단에 섰다.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고독을 강조했고, 고난은 경건과 순결한 삶의 열매라는 것이다. 그는 진리와 평화 사이에 진리 쪽을 선택했다. 1937년 10월 24일, 초량교회에서 설교 중에 「현 정부는 정의와 신의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절대로 굴(屈)할 수 없다」라고 했다. 


지금 이 나라는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의 발생으로 <차별 금지법>과 <교회 폐쇄법>을 밀어붙일 작정이다. 그러나 정권은 유한하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이렇게 국가가 교회를 우습게 알고 ‘정치와 교회를 분리해야 한다’는 엉터리 주장 중에 주기철, 한상동 목사님 등이 거짓된 정치, 권력에 저항했던 어른들이 떠오른다.


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순교자가 나와야 될는지...

작성 2026.02.06 21:21 수정 2026.02.0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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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