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모자를 쓰는 눈부신 몰입의 시간
긴 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아이들과 마주했던 어느 북아트 공개 수업 날이 떠오릅니다, 교실 문을 열며 던지는 아이들의 외침 속에는 묘한 설렘과 기대가 묻어납니다. "우리 엄마 온대요. 오늘 무슨 책 만들 거예요?", "우리 엄마 못 와요. 오늘 무슨 책 만들 거예요?"
평소 북아트 수업에서 아이들이 보여주는 진지하고도 눈부신 창조의 순간은 파트너인 저에게만 몰래 허락된 비밀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부모님들에게는 늘 완성된 결과물만을 쥐여주곤 했기에, 내 아이가 오롯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어 올리는 그 투박하고도 아름다운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시간은 무척이나 귀하고 유일한 기회이지요.
물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엄마가 오지 못해 잠시 서운해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 아쉬운 감정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적어도 '작가의 모자'를 쓰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지요. 막상 수업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이야기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어, 새로운 생각들을 글과 그림으로 쉼 없이 옮기느라 곁눈질할 틈조차 내어주지 않습니다. 진지한 고민 끝에 겹겹이 빌드업 해놓은 상상의 세계를 활짝 열어젖히고, 그곳으로 가족을 초대해 당당하게 소개하는 어린 아티스트들의 모습은 볼 때마다 깊은 경이로움을 안겨줍니다.

서늘한 긴장감, 굳게 닫혀버린 상상의 문
부모와 아이가 작은 책상을 나란히 붙이고 앉아 이야기책 한 권을 함께 엮어가는 참여형 수업은, 본래 화기애애한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지는 축제의 장입니다. 이 시간만큼은 어른들도 평소 보지 못했던 내 아이의 눈부신 창조성이 발현되는 순간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 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교실 한구석에서 묘하고 불편한 기운이 감지되곤 합니다.
사실 그 아이는 평소 저와 단둘이 수업을 진행할 때 별다른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확고하고 단단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입니다. 어른이 섣불리 나서기보다는 그저 이야기 속 사건들의 해결 방법을 곁에서 함께 고민해 주거나 가벼운 질문만 이리저리 던져주어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어른의 굳은 머리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신박한 아이디어로 근사한 결말을 척척 만들어 내곤 하지요.
하지만 곁에 함께 앉은 엄마의 눈에는, 남보다 서툴러 보이는 내 아이의 한글과 삐뚤빼뚤한 그림 실력이 먼저 들어오나 봅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쏟아내는 잔소리 앞에서, 평소 혼자서도 척척 해내던 아이는 결국 짜증을 내며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고 모든 작업을 멈추어 버립니다. 엄마의 표정에 담긴 불만을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서늘하게 얼어붙은 마음으로, 유연하게 흐르며 우주를 유영하던 아이의 상상의 세계는 일찌감치 문을 닫고 맙니다.
오로지 이해하기를, 평가의 잣대가 멈춘 자리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교실, 엄마들이 남기고 간 공개 수업 만족도 조사지를 가만히 정리하다 시선이 멈췄습니다. 아까 굳게 입을 다물었던 그 아이의 엄마가 남긴 단 두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지요.
"잘 못하는 아이들에게 신경을 써주면 좋겠어요. 잘하는 아이들만 챙기는 듯..."
그 짧고 건조한 활자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 한편이 무겁게 답답해져 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잘 못하는 아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 어린 아티스트는 정말 잘하는 아이였고, 이미 자신의 웅장한 세계 안에서 아주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자신들이 만들 이야기에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고, 자긍심을 오롯이 담아 한 권의 책으로 생산해 내는 이 행위는 그야말로 고결한 예술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했습니다. "비웃거나 탄식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오로지 이해하기를." 어른의 조급한 잣대와 무거운 평가의 추를 들이밀어 아이의 표현을 교정하려 들기보다, 그들이 뿜어내는 날 것 그대로의 예술적 열정을 온전히 실감하는 것. 그것이 작은 창조자들을 마주하는 어른의 가장 아름다운 태도일 것입니다. 아이의 황당한 말이나 엉뚱한 행동이 때론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그 사실로 인해 아이가 부끄러워할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반짝이는 별빛을 두 손에 받아 든 독자의 특권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온 마음이 듬뿍 담긴 글과 그림은 아무에게나 쉽게 내어주지 않는 법입니다. 자신이 깊은 밤 상상한 것을 스스럼없이 밖으로 꺼내어놓고, 스스로 깨달으며 느낀 것을 소중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빚어낸 한 권의 책. 그것은 필시 어느 먼 시간의 순수한 열정을 기나긴 궤적으로 통과하고, 이제야 비로소 두 손에 사뿐히 내려앉은 반짝이는 별빛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 내 아이가, 혹은 곁에 있는 작고 어린 아티스트가 조심스레 자신이 쓴 글을 쑥스럽게 내민다면 우리는 하던 모든 것을 멈춘 채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예찬해 주면 될 일입니다.
"와... 이거 어떻게 했어?"
이토록 눈부신 어린 아티스트의 고귀한 독자로 선택받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기쁨의 춤을 추어도 됩니다. 당신은 오늘, 곁에 있는 어린 아티스트의 우주에 입장할 준비가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