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에 취해 옷장문을 열었습니다. 꾸역꾸역 쌓여있는 옷에서 메케한 냄새가 나고 제 몸에 가려운 무언가 돌아다니는 듯 불편했습니다.
네 개의 문짝을 열어 걸려있는 옷을 제외하고 바닥에 엉성하게 개켜있던 것들을 모두 꺼내니 TV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의류 쓰레기산이 만들어집니다.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려라’했는데 허리높이까지 쌓인 더미를 보니 어느 것 하나 설레기는커녕 진저리가 처집니다. 좁은 장롱 안에 이 많은 쓰레기를 차곡차곡 쌓아놓았다니 수집한 그 시간과 돈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살 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몇 번은 기분 좋게 해 줬을 텐데 형편없이 구겨져있는 모습이 추합니다.
신혼 여행지에서 입었던 비치 가운과 청바지가 15년 동안 장롱 깊숙이 박제처럼 처박혀 있었고요.
옷장을 구입하고 처음 넣은 옷이라 다른 옷으로 덮여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얼마나 많은 옷이 그 위를 오고 갔으면 한 번도 손에 닿지 않았을까요.
살 빼면 입으려고 세일 중에 데려온 한 사이즈 작은 카고바지, 친구 따라 덩달아 산 바지, ‘이건 가격이 좀 있는 건데요’라며 위아래를 훑어보던 셀러의 눈빛에 황급히 계산하고 가져온 79,000원짜리 바지, 짙은 파란색 바람막이, 낯선 것도 입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덜컥 구입한 밝은 핑크 블라우스와 똥바지는 한 번도 입지 않은 채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 옷들을 소비할 때 욕망이 잠시 읽히는데요. 옷에 저를 맞추려 했던, 친구에 뒤지지 않으려, 무시당한 듯해서 이성을 잃고, 당장은 필요하지 않지만 막연하게 입을 일이 있을듯해서 혹은 감당하기 힘든 도전 등 여러 마음이 오가는데 이런 욕망은 옷을 대하는 태도만은 아닌듯해서 잠시 멈춰 생각을 고르게 됩니다.
몇 번 입지 않았는데 보풀이 심하게 일어나서 다시는 걸치고 싶지 않은 니트, 아직도 멀쩡한 외투, 몇 년을 입었지만 아직도 쓸만한데 더는 몸을 감싸주지 못하는 옷, 이너로 입겠다고 마련한 비슷한 모양의 검은색 반팔티, 검은색 레깅스들, 한두 개만 있어도 될듯한데 있는지 모르고 산 건지 모르겠으나 네댓 개나 되니 자루에 넣으면서 한숨이 나옵니다.
그때는 정녕 좋다고 입었던 것일 테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버리기 아깝지만 다시 사용할 것 같지 않은 쓰레기인데요.
장례식장과 예식장에 입고 갈 옷 몇 벌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니 다섯 자루가 묵직합니다. 아직 쓸만해서 기부할 것 2자루, 버릴 것 3자루.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인지 20년 전에 입었던 가죽 재킷과 표면이 해진 고어텍스 등산복은 여전히 한구석에 걸어놓았습니다.
이제 신발장을 정리할 차례. 또 얼마나 많은 한숨을 내쉬며 버릴 신발을 붙들고 그와의 인연을 넋두리할까요.
K People Focus 최영미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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