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이 일을 계속해도 될까요.”
상담실 문을 닫고 나오는 길, 그 질문이 조용히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그날 나는 상담자였지만 동시에 흔들리는 한 사람이었다.
아이는 친구 관계에서 겪은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겉으로는 담담했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과 말 사이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지만, 이미 속으로는 하나의 결론을 내려버리고 있었다.
‘이건 버려짐의 문제다.’
아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들과의 관계가 힘들었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에 더 깊은 의미를 붙였다. 관계에서 밀려난 감각, 혼자 남겨진 느낌이라는 해석을 내가 먼저 꺼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상담실에는 두 사람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과거가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이미 이해했다고 믿었다.
‘이건 외로움이다.’
‘이건 오래 남을 상처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붙인 이름이었다.
공감은 상대의 자리에 서는 일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나는 상대의 속도를 기다리기보다 내 해석을 앞세우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다행히 멈출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그 질문이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조금 늦게 이해해도 괜찮고, 조금 덜 알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속도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때 알게 되었다. 공감은 빨리 알아차리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의 흐름을 존중하는 태도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해석하고 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하지만, 이미 결론을 만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사이에서 멈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오랫동안 상담자는 완벽해야 한다고 믿었다. 상처가 다 아물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누군가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나는 여전히 어떤 단어에 긴장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마음이 오래 남는다. 어깨가 굳고 숨이 얕아지는 날도 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 반응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감정에 휩쓸렸다면, 지금은 잠시 멈출 수 있다.
“내가 지금 흔들리고 있구나.”
그 자각이 나를 지켜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상처 그 자체가 아니다. 상처를 모른 채 앞서가려는 태도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완벽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속도를 빼앗는다.
나는 종종 하나님께 묻는다.
“아버지, 아직 다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자리에 서도 됩니까.”
뚜렷한 음성으로 답이 들려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내 감정을 점검하는 순간,
상대의 속도를 기다리는 순간,
내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 순간.
그 자리가 이미 부르심의 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경험은 나를 더 섬세하게 만들었고, 더 신중하게 했다. 그 덕분에 누군가의 작은 떨림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치유는 끝나는 일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다. 상담자 역시 그 과정 안에 있다.
나는 이제 완벽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다 낫지 않아도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혹시 당신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다 나으면 시작하겠다.”
완전해진 뒤에 시작하는 삶은 없다. 상처를 안고 서는 용기 속에서 우리의 소명은 자라난다.
나는 이제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흔들림을 아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늘, 완벽해질 때까지 미뤄 둔 일 하나를 떠올려보라. 그리고 이렇게 말해 보라.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이지만, 물러서지 않겠다.”
그 결심이 당신을 다음 자리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