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마른 자여 오라
예루살렘은 초막절로 들끓고 있었다.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던 이스라엘의 기억을 되새기는 절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기념하는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바로 그 날, 한 사람의 음성이 성전 뜰을 가로질렀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선언은 단순한 종교적 권면이 아니었다. 당시 초막절에는 제사장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 제단에 붓는 의식이 있었다. 이는 광야에서 반석을 쳐 물을 내신 하나님의 기적을 기념하는 행위였다. 그 상징 한가운데에서 예수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으로 선포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성취임을 드러내는 급진적인 선언이었다.
초막절은 수확의 기쁨과 광야의 기억이 교차하는 절기였다. 특히 마지막 날은 가장 큰 절정이었다. 제사장은 물을 붓고 백성은 이사야의 말씀을 노래했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순간 예수는 외쳤다. 조용히 가르친 것이 아니라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절박함과 공개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예수의 외침은 제의적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가리켰다.
요한은 이 물을 성령으로 해석한다. 이는 예수가 영광을 받은 후 믿는 자에게 주어질 성령을 의미했다.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는 차원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했다.
생수는 외부에서 공급받는 한 모금의 물이 아니다. 예수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했다. 이는 믿는 자의 내면이 성령의 통로가 된다는 선언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물은 생명의 상징이었다. 건조한 기후 속에서 물은 곧 생존이었다. 예수는 그 생존의 문제를 영적 차원으로 확장했다. 인간의 근원적 갈증, 곧 의미와 구원에 대한 갈망을 언급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깊은 공허를 경험한다. 성취와 관계, 명예와 정보가 넘쳐나지만 마음은 여전히 목마르다. 생수는 외적 조건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내적 근원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예수의 말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어떤 이는 “이 사람은 참으로 그 선지자라”고 고백했다. 또 다른 이는 “그리스도라”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는 갈릴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의심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지리적 편견이 신앙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은 말씀의 능력보다 출신 배경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결국 군중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진리는 언제나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는 중립지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와 사회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정보는 넘치지만 확신은 부족하다. 믿음은 종종 문화적 선입견과 충돌한다.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를 체포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들은 말했다. “그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말씀의 권위 앞에서 무기가 무력해졌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군중을 저주하며 무지하다고 단정했다. 종교적 확신이 오히려 진리를 가리는 장벽이 되었다.
그때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이전에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인물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는 공개적 신앙 고백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의의 질문을 던졌다. 믿음은 때로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공정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요한복음 7장 37-52절은 단순한 논쟁 기록이 아니다. 이는 목마른 인간을 향한 초대장이다. 예수는 절기의 상징을 넘어 자신을 생수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 물은 믿는 자 안에서 흘러넘치는 강이 된다고 약속했다.
군중은 갈라졌다. 종교 지도자는 닫혔다. 그러나 한 사람, 니고데모는 질문을 시작했다. 신앙은 때로 분열을 낳지만,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연다.
오늘 우리 사회 역시 목마르다. 관계의 갈증, 정의의 갈증, 의미의 갈증이 깊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와 자극을 찾지만, 근원은 채워지지 않는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이 초대는 여전히 유효하다. 생수는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갈증을 인정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솔직하게 목마름을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