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함의 힘을 말하다
『사뿐사뿐 따삐르』가 어른에게 건네는 생태적 상상력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이 구호는 정글의 소란과 닮아 있다. 쿵쿵거리는 코끼리, 쾅쾅 울리는 코뿔소, 깍깍 외치는 새들 사이에서 ‘사뿐사뿐’ 걷는 존재는 오히려 낯설다. 『사뿐사뿐 따삐르』는 바로 그 낯섦을 통해 독자를 멈춰 세운다. 아이를 위한 그림책이지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성인을 향해 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누군가를 밟지 않기 위해 속도를 늦춘 적이 있는가.
이 작품은 말레이시아 정글이라는 이국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소란과 경쟁은 오늘날의 사회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많은 성과, 더 빠른 성장, 더 큰 소리를 요구받는 환경 속에서 ‘사뿐사뿐’이라는 태도는 소극적이거나 나약한 것으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책은 정반대의 결론으로 독자를 이끈다. 조심스러움은 무력함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또 다른 전략이라는 사실을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따삐르 모녀는 꽃 한 송이, 개미 한 마리, 잠든 악어까지 배려하며 움직인다. 이 작은 배려가 결국 사냥꾼의 총성과 맞물리며 역설적 생존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빠름과 강함이 아닌 ‘낮은 발걸음’이 위기를 돌파하는 순간, 독자는 조용함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그렇게 어른 독자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사뿐사뿐 따삐르』의 미덕은 교훈을 직접적으로 설교하지 않는 데 있다. 작가는 따삐르의 생태적 특성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진흙탕을 좋아하고, 나무 둥치 아래에 집을 짓고, 아기와 엄마의 외형이 다른 점 등은 설명이 아니라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 점은 최근 아동문학에서 강조되는 ‘보여주기’의 미학과 맞닿아 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포용의 장면이다. 따삐르를 쫓던 표범이 사냥꾼의 총소리에 얼어붙는 순간, 아기 따삐르는 “우리처럼 해 보라”고 말한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 장면은 단순한 긴장 완화를 넘어, 공존의 메시지를 담는다. 적을 배제하는 대신, 함께 사뿐사뿐 걷게 만드는 상상력은 생태 윤리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서사는 오늘날 환경 담론과도 연결된다. 인간 중심의 개발 논리 속에서 동물들은 점점 더 ‘소리 없이’ 사라진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물들이 모두 살금살금 다니게 되었다는 설정은 안도와 동시에 씁쓸함을 남긴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두려움에 길들여진 생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이들이 느낄 감정의 여지를 열어두면서, 성인 독자에게는 인간의 이기심을 돌아보게 하는 이중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서사뿐 아니라 시각적 구성에도 있다. 수묵 담채 기법을 활용한 정글의 풍경은 화려하기보다 절제되어 있다. 여백을 살린 화면 구성은 ‘사뿐사뿐’이라는 주제와 미묘하게 공명한다. 과장된 색채 대신 먹의 농담으로 표현된 배경은 소란스러운 동물들의 움직임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특히 총소리가 울리는 장면에서 먹물이 번지는 표현은 단순한 효과를 넘어 상징으로 기능한다. 평온했던 화면 위로 흩뿌려지는 먹은 인간의 개입, 즉 폭력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표범의 무늬가 튀어나오는 장면은 긴박함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아이들은 장면의 재미를, 어른은 그 안에 숨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작가 자신이 등장해 따삐르 흉내를 내는 장면 또한 흥미롭다. 이는 창작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메타적 장치로, 독자와 이야기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동물 이야기가 단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 정글 체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작품에 현실감을 더한다.
그림책은 종종 어린이의 전유물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사뿐사뿐 따삐르』는 어른에게 더 절실한 메시지를 전한다. 경쟁과 효율, 성장 중심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꽃과 개미를 밟고 지나왔는가. 타인을 배려하는 느린 걸음은 손해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느림이 결국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자기 장단점에 대한 유연한 시선’이라는 메시지는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 사뿐사뿐 걷는 특성은 표범에게 잡히는 약점이 되지만, 사냥꾼을 따돌리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는 개인의 성향을 단선적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기준에 대한 은근한 반박이다. 조용함, 느림, 신중함은 결코 뒤처짐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생존 전략이며, 공동체를 지키는 윤리다.
오늘날 ESG, 지속 가능성, 생태 전환과 같은 화두가 일상화된 시대에 이 책은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본질을 짚는다. 작은 존재를 밟지 않으려는 태도, 적까지 품으려는 상상력, 폭력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조용한 연대. 그것이 이 그림책이 어른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큰 울림이다.
『사뿐사뿐 따삐르』는 화려한 메시지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 작품은 아이들에게는 배려의 가치를, 어른에게는 생태적 책임을 환기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정글 속을 걷고 있다. 그 길 위에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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