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사이트뉴스 박주환 기자] 오늘날 디지털의 속도가 세상을 지배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예술이 있다. 거친 나무판 위에서 수천 번의 칼질을 견디며 한 글자 한 글자 생명력을 불어넣는 ‘서각’이 바로 그것이다. 서각의 가장 큰 매력은 ‘칼맛’에 있다. 서예가 붓으로 종이 위를 부드럽게 유영하며 ‘더하는’ 예술이라면 서각은 나무의 살점을 도려내며 ‘덜어내는’ 예술이다.
전통의 법고창신을 바탕으로 현대적 조형미를 일궈내는 서각작가가 있다. 한국서각협회와 한국각자협회의 중추로 활동하며 서각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는 김영미 작가가 바로 그 주인공. 전통의 ‘법고’에 현대적 조형미를 더한 ‘창신’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는 그가 서각이 구태의연한 골동품이 아닌 동시대적인 시각 예술임을 증명해 가고 있다.
경북 포항시에 위치한 김영미 작가의 작업실은 진한 나무 향과 함께 시대를 관통하는 서늘한 칼날의 온기로 가득하다. 그에게 서각은 단순한 취미나 기술이 아니다. 서각은 그에게 수행이자,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서예의 유려한 선과 조각의 묵직한 입체감이 만나는 정점에서 김 작가는 나무와 대화를 나눈다. 김영미 작가는 “서예가 평면의 미학이라면, 서각은 그 평면에 깊이와 질감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붓이 지나간 자리를 칼이 다시 따라갈 때, 글씨는 비로소 입체가 되고 영원성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김영미 작가는 나무를 파내며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과 그 끝에 찾아오는 희열이 교차하는 서각의 미학에 심취해 본격적으로 서각작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칼질은 정교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종이 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글씨의 측면과 바닥면이 칼에 의해 드러나면서 평면 속에 갇혀 있던 문장들은 비로소 빛과 그림자의 변주를 얻게 된다. 특히 음각과 양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깊게 파인 음각은 침잠하는 명상의 시간을 의미하고, 도드라진 양각은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생동감을 상징한다. 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글씨는 살아 움직이듯 매 순간 다른 표정을 짓는다. 이것이 김영미 작가의 서각이 가진 ‘시간의 미학’이다.
김영미 작가의 작업 과정은 고행에 가깝다. 서각은 결코 서두른다고 해서 길을 내어주지 않는 정직한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가 시작이다. 수년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잘 건조된 느티나무, 은행나무, 대추나무 등은 작가의 손에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먼저 나무의 결을 살피고 그 위에 글씨를 얹는다. 나무의 옹이나 갈라짐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어지는 판각 과정은 몰입의 정점으로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칼질 속에서 작가는 무아의 경지를 경험한다. 기계로는 흉내 낼 수 없는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칼자국은 빛의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현대적 감각의 채색이 더해지면, 전통 서각은 비로소 현대 미술로서의 화려한 옷을 입게 된다. 그는 오방색뿐만 아니라 아크릴, 천연 안료 등을 과감히 혼합하여 현대적 주거 공간에도 어울리는 조형미를 선사한다.
김영미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성찰’과 ‘위로’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마음을 다스리는 문구나 자연의 섭리를 담은 문장이 많다. 김 작가는 “나무의 속살을 파내는 행위는 결국 제 안의 욕심을 덜어내는 과정과 같다. 깊게 파내 비워낼수록 더 깊은 울림과 빛이 머물며 그 자리를 채운다.”고 말한다.
김영미 작가는 작품을 남기는 데만 머물지 않고 그 너머의 가치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서각이 박물관의 유리 벽 안에 갇힌 유물이 아닌 현대인들의 지친 숨결을 보듬는 ‘살아있는 예술’로 작용하길 바라며 서각의 저변 확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한국서각협회 회원으로서 정기적인 교류전을 기획하고 이끄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의 문화적 문턱을 낮추는 교육 활동에도 열성적이다. 후학들을 지도할 때도 기술적인 기법보다 ‘나무를 대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서각이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훌륭한 정서적 치유제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영미 작가는 “나무를 깎는 것은 나를 깎는 일이며, 나무의 결을 어루만지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늘 말한다. 단지 기술적 전수만이 아닌 나무를 매개로 타인과 공감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인문학적 가치를 전파하고 있는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칼과 망치를 들고 나무의 속살에 자신의 꿈을 새기며 삶을 치유하는 예술적 연대를 경험하고 있다.
“전통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서각 역시 이 시대의 언어를 담아내야 한다. 내 작업이 젊은 세대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는 세련된 예술로 기억되길 바란다.”
나무를 만지고 칼을 휘두르느라 생긴 굳은살은 그에게 훈장과도 같다. 하지만 그 거친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나무라는 차가운 소재에 인간의 온기를 불어넣는 서각작가 김영미. 그가 앞으로 새겨나갈 나무의 결들이 또 어떤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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