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최진실 기자] 이란·미국·이스라엘 간 전쟁은 세계 질서의 우선순위를 다시 안보로 돌려세우며, ESG(환경·사회·거버넌스)를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흔들리던 탄소중립 로드맵은 중동발 안보 위기 속에서 사실상 숫자와 선언만 남은 구호로 추락했다. 각국 정부는 유가 급등과 공급 차질을 핑계 삼아 화석연료 증산, 전략비축유 방출, 원전·석탄발전 가동 연장에 정책의 무게를 싣고 있다. 전쟁이라는 예외상황이 길어질수록 “지금은 탄소보다 안보”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정치 언어가 지배력을 넓혀가는 형국이다.
ESG 각 요소별로 보면 후퇴의 양상이 더 분명하다. 환경(E)은 기후 위기를 당장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미래 세대가 나중에 감당할 과제’로 미루는 데 익숙한 정치의 논리에 다시 포획되고 있다. 사회(S)와 거버넌스(G)의 후퇴는 더 교묘하다. 이란 내부의 정치적 탄압과 언론·인터넷 통제, 반체제 인사·소수자에 대한 인권 침해는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다. 민간인 피해와 난민·실향민 증가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소비되는 통계와 이미지로 전락한다. 방산과 에너지 기업은 전시 특수의 최대 수혜자로 떠오르지만, 로비와 정경유착, 정보 비대칭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ESG 평가에서도 국방·에너지·정보기술 기업에 묵시적 ‘안보 프리미엄’이 붙어 동일한 인권·환경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이중 잣대가 굳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일시적 후퇴를 넘어 제도적 변화와도 맞물린다. 2025년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파리협정 재탈퇴, 화석연료 규제 완화, 전기차·재생에너지 지원 축소, DEI(다양성·공정성·포괄성) 정책 후퇴를 통해 ESG 전반을 향한 정치적 반격에 나섰다. 일부 주에서 추진된 ‘반 ESG 법안’은 공적 연기금과 금융기관의 ESG 투자 자체를 제약하며, 글로벌 ESG 펀드에서 자금 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보 위기와 정치적 포퓰리즘이 결합하면서 “세계가 이렇게 불안한데, 무슨 탄소·인권이냐”는 정서가 제도적 뒷받침까지 얻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정서가 자라고 있다. ESG 공시는 기업에 피로감과 비용 부담만 키우는 ‘과도한 규제(excessive regulation)’라는 인식이 퍼지고, 전쟁과 안보 위기를 핑계로 ESG를 “돈과 시간이 남을 때나 하는 부가 활동” 정도로 격하시키는 유혹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수출과 금융 의존도가 높고 지정학적 리스크에 취약한 한국 경제의 현실을 감안하면,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전쟁과 에너지·안보 충격을 견딜 수 있는 구조적 회복력(structural resilience)을 ESG의 언어로 설계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첫째, 에너지 안보와 기후 위기를 통합한 내부 기준을 세워야 한다. 단기적으로 전쟁과 가격 급등을 이유로 화석연료 비즈니스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더라도, 그로부터 발생하는 초과 이익의 일정 부분을 재생에너지, 효율 개선, 저탄소 기술 등 ESG 관련 투자에 자동 연동시키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방산·에너지·인프라 분야 공급망과 투자 대상에 대해서는 전시 상황을 이유로 인권·지배구조 기준을 후퇴시키지 않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간인 피해 최소화, 부패·제재 리스크, 정보 공개 수준 등에 관한 최소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규제·평판 리스크를 줄이는 길이다. 셋째,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국가와 기업에 대한 금융의 역할을 단순히 ‘배제와 허용’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차등적 평가와 개선 경로를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전시 ESG’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란·미국·이스라엘 전쟁은 ESG가 더 이상 ‘착한 기업’의 이미지를 위한 부속물이 아니라, 전쟁과 에너지·안보 충격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경제 구조를 설계하는 핵심 언어인지를 우리 사회에 묻고 있다. 위기 때마다 가장 먼저 포기하는 장식으로 남을 것인지, 위기 속에서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으로 재탄생할 것인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양세훈
∙ 행정학박사
∙ 한국공공정책신문 논설위원
∙ 한국공공ESG학회 부회장
∙ (前) 한신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