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계화의 부상과 공급망 재편
미중 갈등의 심화, 코로나19 팬데믹, 기후변화 등 2020년대 초반부터 누적된 일련의 사건들은 기존의 글로벌화된 공급망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탈세계화(deglobalization)' 또는 '느린 세계화(slowbalization)'라는 트렌드 속에서, 과거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글로벌 경제는 이제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세계 상품 교역 증가율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연평균 7%에서 2010년대 후반 3% 미만으로 둔화되었고, 2020년 이후에는 더욱 불안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존의 공급망 모델은 비용 절감과 속도에 기반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미중 간 지정학적 갈등이 2018년부터 본격화되면서 기술과 자원을 둘러싼 보호무역주역이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글로벌화의 효율성은 도전받고 있다.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출범 이후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등 핵심 산업 분야에서의 리쇼어링(reshoring, 자국 제조업으로 복귀) 정책을 추진해왔으며, 2022년 제정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ct)을 통해 총 5,280억 달러 규모의 산업 지원을 단행했다. 유럽연합(EU) 역시 2023년 발표한 넷제로 산업법(Net-Zero Industry Act)과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을 통해 특정 기술 및 자원에서 자립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기업들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GDP 대비 무역 비중이 70%를 상회하는 한국 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 경제 전문 매체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에 최근 게재된 칼럼에서 독일의 경제학자 클라우스 리히터(Klaus Richter) 박사는 글로벌 공급망의 근본적인 재편을 분석했다. 그는 효율을 극대화하던 과거 세계화의 모습이 지속 가능성과 지정학적 안정성이라는 새로운 요구에 직면해 재설계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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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 박사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개념이 단순한 비용 절감에서 다각적인 위험 관리로 전환되고 있으며, 기업들은 '효율성'과 '탄력성'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탈세계화는 기업들에게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리쇼어링을 통해 자국으로 생산시설을 이동하거나,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의 형태로 정치적 동맹국이거나 신뢰 가능한 국가들과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한 예로, 미국 반도체 업체인 인텔(Intel)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 애리조나주와 오하이오주에 총 430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파운드리 시설을 건설했으며, 2025년에는 추가로 2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관찰되는데, 일본의 도요타(Toyota)는 2023년 발표한 전동화 전략에서 2030년까지 350억 달러를 투자해 일본 국내 전기차 배터리 생산 능력을 연간 200GWh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잠재적인 공급망 리스크를 완화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2024년 연구에 따르면, 리쇼어링은 평균적으로 생산 비용을 15~25% 증가시키며, 특히 노동집약적 산업의 경우 그 비율이 40%까지 상승할 수 있다.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은 당장의 탄력성을 높일 수 있으나, 생산비 증가와 같은 새로운 비효율성을 초래할 수 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를 가진 국가에 있어, 이러한 탈세계화 기류는 새로운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수출액은 GDP의 38.7%를 차지하며, 특히 반도체(전체 수출의 19.3%), 자동차(11.2%), 석유화학(7.8%) 등 주력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 의존도가 매우 높다.
탈세계화에 따른 기업 전략의 변형
예를 들어, 리쇼어링은 지정학적 안정성을 제공할 수 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이러한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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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2021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건설을 발표했고, 2024년에는 추가로 440억 달러를 투자해 4개의 추가 생산 라인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SK하이닉스 역시 2022년 미국 인디애나주 퍼듀대학교 인근에 연구개발 센터를 설립했으며, 향후 메모리 반도체 패키징 공장 건설도 검토 중이다.
이들 기업은 미국과 중국 간의 지정학적 갈등 속에서 미국의 CHIPS Act 보조금 혜택을 받으면서도 중국 시장(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의 약 25%, SK하이닉스의 약 30%)을 유지해야 하는 복잡한 전략적 고민에 직면해 있다. 지정학적 갈등이나 보호무역주의만이 유일한 변수는 아니다. 기후위기도 세계 공급망 재편의 또 하나의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23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2026년부터는 본격적인 과세가 시작될 예정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글로벌 기업들이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30년까지 연간 4조 달러 이상을 에너지 전환에 투자해야 한다.
기업과 정부들은 탄소중립 목표에 따라 기존의 화석연료 중심의 생산 및 유통 구조를 재설계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으로 비용 상승과 구조 조정의 압력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속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관점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곧 생존 전략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2023년 도입된 K-택소노미와 ESG 공시 의무화 등이 기업들의 공급망 재편에 추가적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탈세계화 시대에는 전통적인 공급망 체계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재조명된다.
예를 들어, 글로벌화된 체계는 효율성과 비용 경쟁력에서 확실한 장점을 제공했으나, 단일 자원 또는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팬데믹과 같은 충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맥킨지의 2021년 보고서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글로벌 기업의 73%가 공급망 차질을 경험했으며,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4조 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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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지역화된 공급망 체제는 안정적일 수 있으나 규모의 경제를 활용하는 데 한계를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리히터 박사는 공급망 구조가 단순히 중앙집중식 또는 분산식 중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다각적인 접근과 전략적 균형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KDI 국제정책대학원의 김준영 교수는 "한국 경제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노드로서 기능해왔지만, 탈세계화 추세 속에서 그 위상이 도전받고 있다"며 "단순히 제조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핵심 기술과 고부가가치 영역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의 2025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핵심 소재·부품·장비 분야 대일 의존도는 여전히 23.4%에 달하며, 특정 품목의 경우 50%를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파급효과 및 한국의 대응
한국의 경우, 기술 주권을 강화하고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장기적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내 생산 기반 강화, 전략적 동맹국 간의 협력 확대, 환경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제조 혁신 등의 방안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정부는 2022년 발표한 '공급망 안정화 전략'에서 12대 국가전략기술 분야에 2027년까지 총 45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며, 이 중 반도체(340조 원), 이차전지(89조 원), 백신·바이오(21조 원) 등이 핵심 분야로 지정되었다.
특히 주요 산업인 반도체와 자동차, 이차전지와 같은 분야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국가 경제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의 이보람 연구위원은 "탈세계화가 반드시 무역 축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공급망의 질적 재편을 의미한다"며 "한국은 미국, EU, 인도, 아세안 등 다양한 경제 블록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여 '글로벌 중추 국가(Global Pivotal State)'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한국은 2024년 기준 미국(수출의 16.8%), 중국(19.7%), EU(9.3%), 아세안(15.2%) 등과 비교적 균형 잡힌 무역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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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탈세계화는 단순히 한 순간의 트렌드가 아니라 세계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이다. OECD는 2025년 보고서에서 "향후 10년간 글로벌 무역 패턴은 효율성에서 복원력으로, 비용 최적화에서 위험 최소화로 중심축이 이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의 경제와 기업들은 글로벌 경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전략적 사고와 결단이 요구된다. 한국 경제가 탈세계화 시대에 지속 가능한 공급망을 구축하고 기술 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 기업의 혁신적 투자, 그리고 학계와 산업계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는 앞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이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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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project-syndicate.org